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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용석 Mar 20. 2021

우천시 시민들은 야구도 못 보고


봄 비에 프로야구 시범경기 개막이 하루 밀렸다. 고작 시범경기니 취소된다고 뭐 대단할 일도 아니다.


야구를 처음 챙겨보기 시작한 90년대, 그때는 TV 중계 한 번 보는 게 참 어려웠다. 지금처럼 모든 경기를 날마다 중계해주지 않았다. 평일에는 TV 중계가 편성되는 일이 거의 없었다. 포스트시즌 때나 중계를 해줬지 정규시즌은 해태 대 LG 같은 빅매치 경기일 때, 그것도 방송 프로그램이 마땅한 게 없을 때만 겨우 편성해줬다.


인터넷도 없을 때니 야구 경기 결과도 알 수 없었다. 9시 뉴스 끝나고 하는 스포츠 뉴스가 유일했다. 스포츠 뉴스에서 경기 결과 확인하려고 9시 뉴스를 봤다. 6시 반에 시작하는 경기가 길어지는 날엔 10시 전에 하는 뉴스에서 경기 결과를 확인할 수 없었다. 그나마 해태가 리드하고 있고 선동열이 등판했다고 스포츠뉴스 앵커가 말하는 날은 두 다리 뻗고 잘 수 있었지만 동정 상황만 확인해준다면 다음 날 아침 신문을 보기 전까지는 경기 결과를 몰랐다.


주말 경기는 그래도 중계를 해주는 편이었다. 당시에는 KBS, MBC 밖에 없으니 최대 2경기를 중계할 수 있었고 그나마 한 경기만 중계할 때도 많았다. 물론 EBS와 KBS1이 있었지만 여기에선 따로 스포츠 중계를 하지 않았고, SBS는 스포츠 중계를 했겠지만 수도권이 아닌 지역에서는 볼 수 없으니 없는 채널이나 마찬가지였다.


주말이 되면 아침에 신문을 펼치고 TV 편성표가 있는 면을 찾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종이 신문에서 TV 편성표를 확인하는 건 참 낯선 일이지만 그때는 그게 유일하고 당연했다. TV 편성표에 해태 경기 중계가 잡혀있으면 환호성을 질렀고, 중계가 없으면 아쉬운 탄식을 내뱉었다. 그래도 내가 응원하는 해태는 인기팀이어서 TV 중계를 많이 볼 수 있는 편이었다.


중계가 잡힌 날은 그 시간만을 애타게 기다린다. 그런데 편성표에 이상한 게 있었다. 예를 들면 MBC 낮 2시 칸에 "해태 타이거즈 대 엘지 트윈스 경기 중계"라고 쓰여 있으면 그 밑에 좀 더 작은 글씨로 당구장 표시와 함께 "우천시"라는 단어가 쓰여있고 그 밑으로는 다른 TV 프로그램들이 쓰여 있었다.


'이상하네, 우천시는 어디에 있는 도시인데 여기만 야구 중계를 안 해주지?'라고 생각했다. 우천시에는 야구 좋아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나? 우천시에서만 사는 사람은 평생 야구 중계도 못 보나? 이런 생각도 덩달아 했다. 우천시에 살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문득 우천시의 뜻을 알게 된 것은 비가 오는 어느 주말이었다. 나는 당연히 해태 타이거즈의 중계를 기다리고 았었다. 빗줄기가 만만치 않았지만 그래도 꼭 야구 경기를 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득 안고서 2시를 기다렸다. 지금이라면 우천 취소되었다는 걸 인터넷으로 바로 확인할 수 있었겠지만 그때는 중계 시작 시간까지는 알 수 있는 도리가 없었다. KBO에 전화해서 경기 취소되었는지 물어봤다면 알 수 있었겠지만 뭐 그렇게까지 할 일도 아니었고 그때는 어려서 그런 방법은 생각도 못했다.


안타깝게도 내 바람과는 다르게 야구 경기가 취소되었다. "두구두구두구"로 시작하는 야구중계 시작 음악도 "전국의 야구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로 시작되는 앵커의 멘트도 없었다. 대신 주말연속극을 재방송해주었다. 아마도 '아들과 딸'이거나 '서울의 달'이었을 거다. 즐겨보던 드라마였으니 재방송도 재미있게 봤다. 그러고 나선 다른 쇼 프로그램을 하는데 갑자기 어떤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가만, 이 프로그램 순서 어디서 본 거 같은데? 아! 우천시 편성표!' 그제야 나는 우천시가 도시 이름이 아니라 '비가 올 경우'라는 걸 깨달았다.


봄비는 마음을 심란하게 한다. "비가 온다구!/나의 소중한 이여./나의 침울한, 소중한 이여."라고 외치고 싶어 진다. 프로야구 시범경기 보면서 쉬는 주말을 기대했는데, 우천시 주민이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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