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용석 Sep 11. 2023

법 짓는 마음

짧은 리뷰 

대통령은 이념 전쟁 한다면서 나 같은 필부가 보기엔 그냥 전 정권에 대한 억하심정 화풀이만 하는 것으로 보이고, 거대 야당 대표 또한 말로는 국민을 위한다지만 그 국민은 자당의 극성지지층만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양쪽 이야기를 듣고 있자면 우리 사회의 모든 문제는 전 정부 탓이거나 검찰 탓이고, 대한민국에는 공산전체주의 세력과 친일파만 득시글 거리는 거 같다. 그래서 나는 요새 정치 뉴스를 보지 않는다. 독재자이자 학살자인 전두환은 국민들이 정치에 관심 갖지 않게 하기 위해 프로야구를 만들었다지만, 요새 보면 야구 뉴스보다 정치뉴스가 사람을 더 바보로 만든다고 느껴질 정도다. 정치 뉴스를 안 보면 안 봤지, 보고 나면 화가 나고 천불이 나고 욕을 안 할 수가 없게 된다. 


그런데 욕한다고 무엇이 달라질까. 나는 한때 진보 활동가로서 너무 쉽게 민주노총 욕을 하곤 했다. 그걸 멈춘 것은 출판사에 들어가 노동조합 활동을 하면서부터인데, 내가 조합원이 되었기 때문에 내 조직이라 욕을 안 한 것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민주노총 안에서 건강한 문제의식을 갖고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조직을 옳은 방향으로 이끌고자 노력하는 활동가들을 보았고, 내 얄팍한 비판이 그들에게 힘을 싣기는커녕 힘 빠지게 만들고 위축시킨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피상적인 비판보다는, 내부에서 애쓰는 사람에게 힘을 실어줄 응원이 더 값지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국회에 대해서도, 민주노총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욕을 한 바가지를 퍼부어도 시원찮을 것이지만, 나는 잠시 피상적인 욕을 유보한다. 대신에 국회 안에서 국회 본연의 목적과 의무, 권능과 한계에 대해 고민하는 입법 노동자들에게 힘을 보태고 싶다. 나쁜 놈들 천지인 국회 안에도 <법 짓는 마음>의 저자 이보라 같은 이들이 있을 테니까. 그리고 이보라 저자의 말처럼 우리가 국회를 버린다면 "권력과 가장 가까운 자들부터 국회를 활용(17쪽)"하게 될 테니까. <법 짓는 마음>은 국회에서 10번 넘게 봄, 여름, 국감, 겨울(223쪽)의 사계절을 보낸 보좌관이 권력과 가장 먼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국회를 잘 활용할 수 있는지 소개하는 국회 활용법을 쓴 책이다. 


저자는 직간접으로 입법에 참여한 법안들을 소개하며, 그 법안들을 어떤 맥락 속에서 어떤 고민과 마음을 담아 만들었는지. 또 법안이 발의된 이후나 법안이 통과된 이후에는 입법취지를 구현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였는지를 세심하게 소개한다. '디지털성폭력 피해자 보호를 위한 법', '청년기본법', '동물원 및 수족관의 관리에 관한 법률', '스토킹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법률', '기후위기 대응을 위한 탄소중립 녹색성장 기본법'처럼 "목소리 없는 자들에게 자기 목소리를 되찾게 하"는(181쪽) 법안이 책 목차를 가득 채우고 있다. 


책을 관통하는 특별한 태도가 눈에 들어온다. 저자는 손쉬운 해결책 거부한다. 사회적으로 인화성 강한 이슈가 터졌을 때, 뉴스 프로그램에 나와 목에 핏대를 세우며 단호한 조치를 외쳐대는 정치인들의 모습과는 사뭇 대조적이다. 손쉬운 해결책은 복잡한 문제의 본질을 오히려 가리기 때문이다. 대신 피해자에게 정치가 왜 가닿지 못했는지를 고민하고, 국회가 만드는 법이 시민들의 구체적인 삶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를 살핀다. 이겨야 할 정치적 상대방이 있는 게 아니라 대리해야 할 국민과 설득해야 할 반대편의 동료 시민들과 의원들이 존재하는 정치. 어찌 보면 너무나 당연한 태도여야겠지만 현실적으로는 굉장히 낯선 모습이기도 하다. 


이런 태도는 실질적인 변화를 만들어야 내기 위한 분투이기도 하다. "국회까지 전달되는 피해자의 말은 이미 수많을 곳을 거쳐 오며 문턱마다 좌절한 말"(42쪽)들이기 때문이다. 참사로, 국가폭력으로, 사적 폭력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잃거나 삶이 무너진 이들이 정치에 바라는 것은 고상한 이념이나 그럴듯한 청사진이 아니라 아주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법과 제도로 규율되는 변화들이다. 그러니 "공감은 당위고 해결은 의무"(44쪽)라는 자세로 피해자들을 만나고, 법과 제도를 구현하는 공무원이 일을 할 수 있게끔 예측 가능성과 확신을 주는 "구체적인 경로가 되는 법적 근거를 만드는"(71쪽) 일에 몰두한다. 


그러면서도 늘 흔들린다. 번지르르한 말로 헛된 희망을 고문하지 않으려는 다짐이 때로는 "위선하지 않으려다 최선까지 놓아버리는 것은 아닌지"(147쪽) 스스로도 헷갈리기 때문이다. 법과 제도, 정부의 보고서에 "쓰이지 않는 진실"에 주목하고 "거리에서의 참여와 저항"이 그 진실을 쓰는 목소리라는 저자의 외침이 뜬구름 잡는 아름답기만 이야기로 보이지 않는 까닭은 그의 고민과 노력이 얼마나 현실적인지 책 구절마다 잘 드러나기 때문일 것이다. 최선을 놓지 않는 이상주의와 구체적인 변화를 만드는 현실주의의 조화 또한 우리가 정치에 바라는, 하지만 눈을 씻어도 지금은 볼 수 없는 아득한 풍경이다. 


혼탁한 정치적 상황 속에서 어쩌면 멸종위기 희귀동물과도 같은 정치 본연의 역할과 권능, 한계와 몫을 고민할 수 있는 까닭은 저자가 페미니스트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페미니즘 정치가 단순하게 생물학적 여성을 위한 정치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책에서 주요하게 다루는 법안들 가운데는 디지털성폭력, 가정폭력, 스토킹 범죄처럼 여성이 피해 당사자인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는 이 사회의 폭력이 어떻게 구조화되어 있는지를 결과적으로 보여주는 지표일 뿐이다. 페미니즘은 이 사회에서 폭력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누가 폭력에 노출되어 있는지를 섬세하게 바라보는 세계관이다. 그렇기 때문에 가해자를 단죄하는 것에, 반대편을 몰살하는 것에 몰두하지 않고 폭력의 구조를 끊기 위해 사회와 공동체가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지를 살필 수 있는 것이다. 


정말 오랜만에 정치란 무엇이고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뜨거운 마음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책이었다. 또한 우리가 국회를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지를 차가운 이성으로 생각해 볼 수 있게도 해주었다. 맹목적 지지를 넘어서는 뜨거움, 냉소를 비껴가는 차가움이 우리 정치에서도 가능하고, 더 많이 가능해져야 한다는 사실이 무척 반갑다. 


















매거진의 이전글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