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배를 기다리며
한때 소확행이라는 말이 유행했다. 작지만 확실한 행복. 나는 이 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작은 행복이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 건 아니다. 오히려 나는 운동권들이 너무 큰 이야기만 늘어놓으며 작은 행복의 큰 의미를 외면하는 것에 문제의식이 있는 편이었다. 하루하루를 분투하며 살아가는 뭇사람들에게 하루치의 노동을 견디게 해주는 소소한 행복을 만들어 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 채 거대한 이야기에만 몰두하는 화법을 경계한다. 소확행에서 마음에 안 들었던 건 ‘소’나 ‘행’이 아니라 ‘확’이었다. 마치 이것만이 ‘확실한’ 행복이라는 단언적인 태도가 싫었다.
소확행의 예시로 많이 언급된 것 중 하나가 택배를 기다리는 즐거움이었다. 나는 이 또한 전혀 공감하지 못했다. 나는 물건을 잘 사지 않는 편이었고, 그러다 보니 잘사는 기술이 떨어지는 사람이었다. 때문에 나는 지금도 인터넷에서 뭔가를 사는 일이 많지 않다. 구매한 물건을 교환해야 하면 어쩌나 환불받는다면 반납을 어떻게 해야 하나, 덜컥 겁부터 난다. 차라리 기자회견 사회를 보는 것이 나에겐 더 쉬운 일이다. 책을 살 때도 나는 아주 급하지 않으면 오프라인 서점에서 산다.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봐야 살 결심을 하게 되는 편이다. 그러니 택배를 받아볼 일도 별로 없고, 택배를 기다릴 때의 설렘이나 택배가 도착해서 박스를 열어볼 때의 희열을 모를 수밖에.
다 예전 이야기다. 나는 이제 택배를 기다리는 즐거움이나 택배박스를 열 때의 은근한 두근거림을 즐길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사회변화나 세상에 대해 냉소적인 건 아니지만 작은 행복들의 소중함을 더 크게 느끼는 사람이 되었고, 그런 행복을 만들기 위해 애쓰는 사람이 되었다. 인터넷 쇼핑은 여전히 별로 안 하지만 가끔 내가 주문한 물건 혹은 누가 보내준 택배가 집 앞에 도착했다는 문자를 받을 때면 그날은 빨리 퇴근해서 집에 가고 싶어 진다. 특히 내가 뭘 주문하지도 않았고 택배 올 게 없는데 택배가 도착했다는 연락이 오는 날은 그게 뭘지 궁금해하며 집에 오는 일이 무척 즐겁다. 그런 경우는 대부분 출판사에서 보내주는 신간 도서지만, 책은 돈 주고 사봐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무얼까 상상하며 가는 시간만큼은 사라지지 않으면 좋겠다는 심정이다.
어제는 회의 끝나고 늦게 집에 가는데, 무심코 우편함을 봤는데 뭔가 묵직한 것이 있었다. 택배 온다는 문자도 없었는데, 일반우편으로 와서 그랬나 보다. 꺼내보니 책이다. 무슨 책이지? 내가 주문한 건 아니고, 따로 책을 보내줄 곳도 없을 거 같은데. 한달음에 계단을 올라 집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봉투를 뜯어봤다. 세상에, 내가 에피를 구독하고 있는 걸 깜박했다. 주제가 ‘새들의 도시’ 구나. 꽤 밀도 높은 회의를 마치고 12시를 넘기기 직전에 들어왔는데, 하루치의 고단함이 에피 표지를 보고 사라졌다.
아 나는 여전히 ‘소확행’이라는 단어와는 안 맞나보다. 이걸 어찌 작은 행복이라고 말할 수 있나. 이렇게나 커다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