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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0 메이데이 청년학생투쟁단 회의의 기억

누구나 이불킥 날리는 과거는 있으니까

by 이용석 Feb 23. 2025

가끔 나는 평화활동가 동료들과 우리가 온실 속에 사는 화초라며 쓴웃음 섞인 농담을 나눈다. 이때 온실은 전쟁없는세상, 더 넓게 보면 평화운동판이다. 여기 사람들은 대체로 착하고, 모두 예의 바르다. 숫자가 그리 많지 않아서 그리고 워낙 사회 전체로 보면 소수파에 해당하니 생각도 비슷한 면이 많다. 그렇다고 의견이 늘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긴장감이 감도는 의견대립이 있지만 그래도 서로 존중하며 합의를 만들어간다. 소중한 동료들에게 감사해야 할 일이지만, 너무나 당연하게 일상처럼 느껴져서인지 이 소중함을 종종 잊고 산다. 그러다가 어떤 회의, 어떤 자리에 가면 옛날 기억들이 불쑥 떠오르기도 한다. 아래와 같은 기억들이.




2002년이었나, 아마도 3월 말 혹은 4월 초였을 것이다. 나는 흔히 말하는 PD계열, 그중에서도 전학협(전국학생회협의회)라는 그룹에서 활동을 하고 있었고 우리 학교 문과대 학생회장이었다. PD계열 학생운동그룹들에게는 일 년 중 가장 중요한 행사가 4월 30일 청년학생 문화제와 5월 1일 노동절(메이데이) 집회였다. 보통 전국에서 모인 학생들이 문화제를 하고 1박을 한 뒤 집회에 참여하는, 1박 2일짜리 투쟁이었다. PD계열 학생운동 그룹들에게는 3월에 입학한 신입생들을 조직하는 중요한 이벤트기도 했다.


각기 다른 정파들이 모여서 '청년학생투쟁단' 뭐 대충 이런 이름의 연대체를 만들어서 430-메이데이를 준비했다. 투쟁단의 대표를 뽑고, 집행국을 구성하고, 투쟁단 발대식 집회를 하고, 430 문화제와 집회를 기획했다. 그중에서 투쟁단의 대표를 뽑는 일이 가장 뜨거웠다. 당시에는 내가 속한 전학협 의장(연세대학교 총학생회장)과 지금은 전국학생행진으로 이름이 바뀐 전국학생연대회의 의장(서울대학교 총학생회장)이 투쟁단의 대표를 각축을 벌였다.


대표성을 띤 학생들이 회의에 참석해서 대표자를 뽑았는데, 첫 번째 회의인지 두 번째 회의인지를 서울대에서 했다. 내 기억으로는 약 130여 명의 학생대표자들이 모였던 것 같다. 총학생회장, 총여학생회장, 단과대 학생회장들 뿐만 아니라 과학생회장과 소모임이나 학회장들 중에서도 참석한 사람들이 있었다. 각 학생운동 조직은 자기 조직에 유리한 결정을 끌어내기 위해 있는 대표자 없는 대표자 싹싹 긁어모았다. 나도 문과대 학생회장이었으니 당연히 참석했다. 그때 우리 학교에서는 등록금 투쟁으로 중앙운영위원회(총학생회장단과 단과대학생회장으로 구성)가 단식 투쟁을 할 때여서 나도 단식 중이었지만 한 명이 아쉬운 상황이니 빠질 수 없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토론은 격렬했고 안타깝게도 우스꽝스러웠다. 정세분석이 이어지고 조직구성 논의, 기조와 구호 논의가 뒤죽박죽이 되어 난상 토론을 했다. 사실 답정너의 토론이었다. 우리는 연대 총학생회장이 투쟁단의 대표가 되어야 한다는 이야기였고, 연대회의 쪽 사람들은 서울대 총학생회장이 투쟁단의 대표가 되어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타협이니 협상이니 이런 걸 하면 무조건 개량주의자라고 여겼던 시절이었다. 양쪽은 서로 한 치의 양보도 없이 팽팽하게 붙었는데 이게 코미디였던 건, 서로가 알고 있는 진짜 속내는 입 밖으로 꺼내지 않고 토론의 주도권을 쥐기 위해 얼토당토않은 이야기를 정말 진지한 표정과 심각한 말투로 했다는 데 있다.


누군가 조직 구조를 먼저 짜고 그다음에 핵심 구호를 정해야 한다고 주장하면 반대쪽에서는 무슨 소리냐며 구호가 있고 난 뒤 그걸 구현할 조직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 다른 쪽에서는 또 마르크스가 독일이데올로기에서 이러저러하다고 말했다며 반박하면, 이번에는 레닌이 한 말을 인용하며 재반박을 했다. 서로 설득될 수 없는 무의미한 논쟁을 밤새 했다. 누군가 지쳐서 표결로 정하자고 하면, 다수결이 어떻게 민주주의냐고 맞받았다. 총학생회장과 단과대 학생회장만 투표권을 주자고 하면, 그렇게 하면 투표에서 밀릴 거 같은 그룹은 왜 소모임이나 학회 같은 자치조직은 차별하냐고 따졌다. 우리는 토론을 위한 규칙이나 룰조차도 합의하지 못한 채 마르크스와 레닌을 인용하며 밤을 지새웠다. 그렇게 날이 밝으면 이제 학우들을 만나러 가야 한다고 한 명 두 명씩 지친 눈꺼풀을 끌고 자기 학교로 돌아가곤 했다. 그리고 그런 바보 같은 논쟁에 부끄럽게도 나 또한 적극적으로 뛰어들었다. 마르크스도 레닌도 읽지 않았으니 인용하진 않았지만 궤변을 늘어놓은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 다음  회의는 연세대에서 했다. 나는 학내 이슈 때문에 회의에 늦게 가게 되었다. 그때도 단식 중이었는데, 과 선배가 택시를 같이 타고 신촌으로 와서 칼국수 집에서 칼국수를 시켜주었던 기억이 난다. 그 선배는 그냥 먹어도 된다고 했지만 미래의 양심적 병역거부자(그때는 병역거부 선언 하기 전이다)가 될 떡잎이었던 나는 면은 차마 양심에 찔려서 먹지 못하고 국물만 몇 숟가락 뜨고는 회의장에 들어갔다. 이 회의에 대한 기억은 별로 없다. 회의장에 조금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회의 사회자인 연세대 총학생회장 옆자리에 앉았는데, 이미 지칠 대로 지친 나는 밤새 이어진 회의 내내 꾸벅꾸벅 졸았기 때문이다. 하필 사회자 옆에 앉아서 회의 참석한 모든 이들이 시간이 갈수록 중력에 겨우 떨궈지는 내 모가지를 봤을 것이다. 그들은 기억도 못하겠지만 지금도 생각하면 창피하다.


그 해의 투쟁단 단장은 결국 전국학생연대회의 소속 서울대총학생회장이 되었다. 전학협 소속인 내가 전학협 의장 옆에서 회의 내내 꾸벅꾸벅 졸았기 때문은 아니다. 내 기억으로 당시 학생운동은 어떤 합리성에 입각한 토론과 조율보다는 결국 힘싸움으로 대장을 정했고, 전학협이 연대회의에 힘싸움에서 밀렸던 것이다.


그리고 4월 중순 종묘공원에서 430-메이데이 청년학생투쟁단(실천단이었나?) 발대식 집회가 열렸는데 이 사회를 내가 보게 되었다. 중요한 집회니 나름 준비를 많이 했다. 두 번째 회의 내내 졸았으니, 그걸 좀 만회하고자 하는 마음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발대식 집회에는 사람이 50명 정도밖에 모이지 않았다. 서로 대장 먹으려고 달려드는 회의에는 100명이 훌쩍 넘는 사람들이 참여했는데, 학회니 소모임이니 하는 곳에서도 여러 명이 와서 발언권을 달라하며 목소리를 높였는데 정작 그렇게 구성된 투쟁단 발대식에는 50명 남짓만 왔을 뿐이다. (430 문화제나 노동절 집회에는 그보다는 많이 왔지만) 어쩌면 나는 그때 우리가 하는 운동방식의 몰락을 직감했던 거 같다.


물론 발대식 집회가 막 그렇게 중요하냐 하면 아닐 수도 있지만, 실천하는 장소보다 권력싸움 자리싸움에 더 진심인 사회운동을 누가 신뢰하겠나. 권력싸움 자리싸움의 수준이라도 높다면 거기서 이루어진 토론이 사회 진보에 도움이 될 텐데, 앞서 이야기했듯이 어떻게 해도 상관없는 지엽적인 것을 쟁점으로 만들어 서로 힘싸움하면서 마르크스와 레닌을 인용하며 코미디를 찍지 않았나.


대학시절 마지막 해에 전학협이 내부 분열로 망했다. 졸업한 뒤 나는 바로 전쟁없는세상에서 활동을 시작했는데 이것이 내겐 무척 행운이었다. 전없세 초창기 시절엔 아직까지 학생운동 시절의 습성이 몸에 배어 있었겠지만, 평화활동가들과 함께 활동하고 배워가면서 나쁜 습성을 떨쳐낼 수 있었다.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은 무조건 틀렸고 우리가 저들을 논쟁으로 깨부숴야 한다는 폭력적이고 예의 없는 습성, 운동의 성공보다는 우리 조직의 성과를 바라는 이기적인 태도 같은 것들을 버리고 나니 사회운동이 훨씬 재밌어졌다. 가끔씩 20년도 더 전 430-메이데이 회의 때 내 모습 같은 태도를 보이는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그러면 그냥 한숨을 쉬고 만다. 그들을 미워하는 데 에너지 쏟기보다는 내 옆에 소중한 평화활동가들 챙기는 데 더 큰 에너지를 쏟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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