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동가라는 직업의 보람
한겨레 토요판에 연재되는 은유 작가의 인터뷰 꼭지는 늘 좋지만 성폭력상담소 부소장 김오매를 인터뷰한 이번 글 ‘피해자의 말이 살아날 때 사회도 변화할 수 있어요’는 특히 더 좋았다.
반성폭력 운동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는 면도 좋았고, 특히 내 눈길이 오래 머물고 거듭 읽은 부분은 아래 구절이었다.
-부소장님이 이번 인터뷰에 응하면서 ‘생존자와 활동가가 같이 일궈온 반성폭력 운동’이 개인의 공로가 될까 봐 우려했어요. 피해자는 운동 주체라기보다 무력한 존재라는 인식이 일반적인데요.
“그렇죠. 피해자가 신고할 때는 힘이 생겼을 때예요. 성폭력 생존자들이 이 사회를 바꿔온 힘이 있는데 그걸 우리가 무시하거나 없던 걸로 만들어요. 한 개인이 자기 성폭력 피해를 해결하기 위해 길을 나섰다는 건 사회운동이고, 활동가는 그 길에 전문적인 정보를 주는 조력자예요. 상담가, 치료자가 아니라 기존의 법과 제도를 바꾸고, 예산을 확보하고 인식을 바꾸고, 그런 사회 변화를 목표로 한다는 점에서 활동가라고 불러요.”
이런 인터뷰 질문은 처음 봤다. 사회운동을 건강하게 일구어가고자 노력하는 활동가들은 오매 부소장과 같은 고민을 한다. 모두가 함께 일군 사회운동의 성과가 한 사람이 주목받는 것으로 돌아가지 않기 위한 노력들. 하지만 언론은 활동가들의 노력과는 반대 방향으로 사회운동을 다룰 때가 많다. 언론도 팔려야 하니 이해 못할 바는 아니지만 아쉽긴 하다. 그런데 활동가들의 이런 고민을 이야기해주는 인터뷰라니. 그다음 질문도 놀랍긴 하다.
-활동가가 왜 좋은 직업이냐고 물어보면 뭐라고 답하시겠어요?
“우리 힘으로 뭔가를 만들어낸다는 게 주는 엄청난 건강함이 있어요. 사람으로 살아가는 데 힘이 돼요.”
나도 병역거부운동 하면서 수십 번 인터뷰를 해봤는데 이런 질문은 받아본 적이 없다. 스트레이트 기사 인터뷰는 아무래도 따야 할 멘트가 정해져 있어서 그러겠지만 다른 인터뷰들도 마찬가지다. 활동가라는 직업에 대해 궁금해하는 인터뷰어를 만나는 일도 굉장히 드물다. 어떤 사회운동에 대해 심층적인 기사를 쓰거나 글을 쓴다면 당연히 그 사회운동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직업인들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할 텐데, 대부분의 인터뷰어는 사건의 당사자들-예컨대 유가족이나, 피해자나, 폭로자 들에 보이는 관심만큼 활동가들에게 관심을 갖지 않는다. 하지만 긴 세월 동안 사회운동이 지속될 수 있는 것은, 그래서 마침내 사회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는 것은 오랜 세월 묵묵히 자신의 역할을 해 온 활동가들 덕분이다.
병역거부자 오태양 앞에 평화활동가 최정민이 있었고, 고 황유미의 아버지 황상기의 옆에는 이종란이 있었고, 성폭력 피해자들과 함께 김오매가 있다. '최정민' '이종란' '김오매' 들, 활동가들이 있었기 때문에 10년이 넘도록, 20년이 가깝게 이 사회운동들이 지속되고 유의미한 사회 변화를 이끌어 오고 있는 거다.
인터뷰 질문도 질문이지만, 답변은 더욱더 대단하다.
첫 번째 대답의 질문은 사회운동 활동가가 무엇인지 명쾌하게 정의 내려준다. "기존의 법과 제도를 바꾸고, 예산을 확보하고 인식을 바꾸고, 그런 사회 변화를 목표로 하는 사람" 상담가나 치료자와는 다른 사람. 깊이 공감한다. 사실 내가 이 매거진에서 하고 싶은 이야기의 핵심은 바로 이 문장일지도 모르겠다.
두 번째 대답의 질문 또한 아주 간결하고 담백하지만, 나에게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사실 활동가들이 이 일을 하는 이유는 여러가지일 것이다. 사람들이 직업에서 얻고자 하는 많은 요소 가운데 어떤 것들은 활동가들은 얻을 수 없는 게 있다. 큰돈. 활동가 출신으로 다른 직업인이 되어 큰돈을 버는 이들이 더러 있겠지만, 활동가면서 큰돈을 버는 것은 불가능하다. 큰돈을 벌려면 활동가를 해서는 안 된다.
반대로 다른 직업인들과는 다르게 활동가들만 누리거나 활동가들이 특히 더 누릴 수 있는 것들도 있다. 예를 들면 일반적인 회사에서 받는 스트레스-비민주적인 구조에서 기인하거나 노동자의 권리가 약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들에서 활동가들은 좀 더 자유롭기 쉽다. 물론 단체의 규모나 문화, 분위기에 따라 그러지 않은 활동가들도 있는데, 이 경우 많은 활동가들이 안 좋은 기억을 갖고 사회운동을 떠나게 된다.
내 경우는 김오매 부소장과 비슷하다. 사회 변화를 만들어 가는 일에서 느낄 수 있는 보람이 가장 크다. 이건 어떤 의미에서는 게임 스테이지를 클리어 할 때 받는 성취감과도 비슷할 수 있다. 거기에 더해, 내가 달성한 목표가 단순히 내 개인의 목표이기만 한 게 아니라 사회를 좀 더 나은 곳으로 만들어 간다는 것에서 나는 자부심을 느낀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돈 버는 일들 가운데 가장 재밌고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이 사회운동 활동가다. 결국 밥벌이는 해야 하는데, 몇 개 안 되는 직업만 경험해봤지만 나는 그중에서 활동가라는 직업이 가장 재밌다. 재미만 있는 게 아니라 직업인으로서 가장 인정받는 것도 활동가였다.
논술학원에서 첨삭하던 일은 정말이지 돈 벌려고 했지 나 스스로 진지하게 직업으로 생각한 적이 없고, 출판 편집자는 잘해보려고 했으나 내가 생각하기에도 동료들이 생각하기에도 나는 편집자에 어울리지 않았다. 반면 활동가일 때 나는 자신감 넘치고, 내 생각으로는 주변에서 인정도 받는다. 재밌으니까 더 열심히 하고, 열심히 하니 더 좋은 결과가 나와서 더 재밌고, 선순환이 이뤄진다.
물론 활동가가 내 천직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요즘 세상에 천직이 어디 있나. 나도 언젠가는 전쟁없는세상을 그만두고, 활동가가 아니라 다른 직업을 갖게 되겠지. 그게 언제일지는 몰라도 말이다. 그때까지는 재밌게 일하고 싶다. 우리의 일에 대한 합당한 인정도 받고 싶다. 착한 사람들에게 보내는 칭찬 말고, 일 잘하는 사람들과 성과를 만들어낸 사람들이 받는 존경과 갈채를 활동가들이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