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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그린 Feb 09. 2021

작년 가장 큰 성취는 목표 세우기를 그만둔 것

2020년을 돌아보며

재작년인 2019년은 나에게 정신적으로 힘든 해였다. 


대학을 졸업하고 처음 신입으로서 직장생활을 시작했지만 나는 만족하지 못했다. 

나의 직급, 조직 문화, 업무 .. 모든 것이 새롭고 어려웠지만 제대로 적응하지도 못한채로 이직 준비를 시작했다. 

나는 매사에 괴롭고 혼란스러운 기분을 느꼈다. 무거운 돌덩이가 마음 속에 계속 박혀있는 기분이었다. 

나에게 행복의 기준은 너무나 명확했다. 우선 특정 Tier 이상의 직장에 다니는 것은 행복의 기본 중 기본이었다. 나는 내가 원하는 Tier에 속한 직장에 다니지 못하고 있었으므로 행복할 자격이 없었다.


주말마다 친구들도 만나지 않고, 카페나 집에 틀어박혀 온종일 이직 준비를 했다.

당연히 연애 그 비슷한 것을 상상할 여유는 없었다. 

오로지 커리어만이 나의 관심이었다. 


19년 하반기, 내가 원하는 직장에 들어가기 위해 다시 면접 과정을 거쳤으나 또 떨어졌다. 

직장인이 고시생처럼 준비했는데도 이직에 실패하자 나는 마치 내가 거대한 실패의 늪에 빠진 것처럼 느껴졌다. 

내가 원하는 직장에 들어가지 못하는 한 나는 평생 불행할 것 같았다.


나는 내가 만든 지표들로 스스로를 불행하게 만들고 있었다. 


작년인 2020년부터 나는 차츰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음을 깨닫기 시작했다. 인생은 너무나 복잡미묘한 것이어서 직장의 Tier가 나의 행복을 규정해주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목표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고등학교 3년을 치열하게 보내고, 재수까지 해 원하는 대학의 졸업장을 결국 얻어낸 나는 대학을 가서도 계속해서 목표를 위해 살았다. 연도별로, 분기별로, 달별로 목표가 있었다.

나에게는 대학교 행사를 즐기는 것보다, 친구들과 좋은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 책을 읽으며 교양을 쌓는 것보다 항상 성취와 직결되는 나의 목표들이 최우선이었다. 

그렇게 결국 내가 원하는 업계에서 일을 시작하게 되었는데, 새로운 목표들은 계속해서 생성되었고 그 목표들은 나를 괴롭게 했다. 

나의 목표들은 현재 내 자신이 부족하기에 더 나은 것, 더 위대한 것을 추구해야 한다는 발상에서 비롯되었고, 그렇기 때문에 나는 내가 살아가는 현재에 한번도 만족할 수가 없었다. 

현재에 만족하는 것을 오히려 두려워하기도 했었던 것 같다. "행복하다"라고 말하는 것조차 조심스러웠다. 

"이것보다 더 나은 상황일 수도 있을텐데, 과연 내가 행복하게 맞을까?"하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런데 어느날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나의 목표들을 위한 준비를 하다가 내 인생을 제대로 살지도 못하고 인생이 끝나버릴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계속해서 현재보다 더 나은 것이 되기 위한 목표를 세웠는데 내가 세우는 목표들은 끝이없어서, 목표를 위한 준비가 n년에서 1n년이 되고, 2n년이 되고 결국 내 인생이 그렇게 끝나버릴 것 같았다. 미래를 위한 준비보다는 현재를 살고 싶었다. 


2020년, 현재 다니는 직장에 만족하기로 하고 미래보다는 현재에 에너지를 쏟는 법을 배웠다.

그리고 작은 습관들을 만들기 시작했다. 



1. 인스타그램과 유튜브 앱을 지웠다 

나는 일상이 지루해질 때마다 습관적으로 인스타를 켰고, 밤에는 침대맡에서 유튜브를 몇시간씩 보고 잠들었다. 나에게는 특별한 사고를 요하지 않는 너무나 당연한 습관이었지만, 사실 이 두개가 나에게 주는 유익은 딱히 없었다. 차라리 그 시간에 넷플릭스 쇼를 하나 끝내거나 영화를 보면 사람들이랑 얘기할 대화주제라도 생기고, 느끼는 것이라도 있지만 스낵형 콘텐츠 중심인 두 SNS에서는 그러한 유익조차 얻어내기 어려웠다. 

이 두가지 앱을 지운 순간 나는 자유를 얻었다. 그리고 인스타를 보며 스스로의 삶이 불행하거나 부족하다고 여기는 고약한 버릇이 없어졌다. 



사진 출처: https://www.nytimes.com/guides/well/strength-training-plyometrics

2. 홈트레이닝을 통한 몸매/건강관리를 시작했다

운동은 나에게 건강관리나 체력증진보다 훨씬 큰 의미를 가진다. 운동을 통해 변화된 외모를 보는 데서 오는 만족감이 생각보다 크다. 퉁퉁 부어있는 내 자신을 볼 때는 항상 잔잔한 스트레스가 일상 속에 깔려있는 기분이라면, 운동을 통해 예전보다 늘씬해진 나를 보면 흐뭇함이 들며 기분이 좋아진다. 일이 많이 바쁠 때는 쉬는 기간도 있었지만, 내가 원할 때 아무 생각없이 매트를 깔고 유튜브 영상을 키고 운동을 하는 습관을 만들었다는 것 자체가 의미있는 성과라고 생각한다. 



이미지 출처: https://studybreaks.com/thoughts/airpods-new-age-antisocial/

3. 2n년만에 뉴스 보는(듣는) 습관을 길렀다

부끄럽지만 경주마처럼 달렸던 나는 사실 뉴스 볼 여유가 없었다. 세상 돌아가는 것보다 내 눈앞에 있는 목표들이 가장 중요했기 때문이다. 한번 보지 않으면 계속해서 보지 않게 되어 여유가 생겨도 보지 않았다. 몇번 네이버 뉴스 플랫폼에 들어가보았지만 어떤 뉴스 먼저 봐야할지 모르겠어서 결국 꾸준히 읽지 못했다. 그러다 언론사들이 podcast를 진행한다는 것을 알게되었고, 작년 말부터 듣게 되었다. 무엇을 골라야 할지 몰라도 그냥 듣기만 하면 되니 정말 효율적이고 편했다. 뉴스는 들으면 들을 수록 재밌었고, 사고가 확장되는 기분이었다. 어떻게 시사를 모른 채로 내가 똑똑함이나 지성 따위를 논했나 싶었다. 뉴닉/어피티/순살브리핑 등 시사 뉴스레터들도 구독했다. 원래는 출근길에 뉴스를 들었으나 재택근무가 시작되면서부터는 홈트레이닝 영상을 음소거 상태로 틀어놓은 채로 뉴스를 듣는다. 매우 만족스럽다. 지적 허기와 신체적 욕구가 동시에 충족되는 느낌이다. 



4. 다시 책을 사랑하게 되었다 

나는 어린 시절에 책을 사랑했다. 특히 문학을 좋아했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여름방학동안 100권을 읽는 챌린지에 참여하기도 했었다. 그런데 고등학생이 되면서 나는 1분 1초가 아까웠고, 책이 시간 낭비처럼 느껴졌다. 한번 책을 놓게되자 대학교에 가서도 다시 읽는 게 쉽지 않았다. 이따금씩 서점에서 자기계발서적을 찔끔찔끔 읽긴 했지만 적극적으로 책을 찾아 읽지는 않았다. 작년에 나는 마음의 여유를 회복하며 다시 책을 읽게 되었다. 투자, 사업, 경제, 자서전, 뇌과학, 통계, 철학, 심지어 수학/과학에 대학 책까지. 서점에 가서 관심있는 분야의 책들을 쌓아놓고 읽는게 나만의 힐링 취미가 되었다. 다 읽어야 한다는 부담 없이 읽고 싶은 부분을 쏙쏙 골라 읽고, 정말 좋은 책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다. 책은 권태로운 일상에 계속해서 새로운 자극을 주고, 나의 제한된 경험과 지식을 넘어선 다양한 지적 자산을 쌓을 수 있도록 도와준다.



사진 출처: The Guardian "Typewriters and their owners: famous authors at work – in pictures" 

5. 다시 글을 쓰게 되었다

글을 쓸 때 나는 비로소 나의 복잡한 생각들이 정리되고, 마음에 안정을 얻는다. 꾸준히 글을 쓰고 공유하는 습관을 갖고 싶었지만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있다가 작년 말에 브런치 작가에 합격하며 다시 시작하게 되었다. 글을 쓴다는 것은 예전부터 나의 중요한 정체성 중 하나였기에, 글쓰는 습관을 통해 나는 나의 중요한 일부를 되찾은 느낌이 들었다. 걱정도 생각도 많은 사람인 나는 글로 생각을 정리하고 나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심리치료가 따로 필요없다. 




목표로부터 해방된 나는 이제 더 나은 행복을 상상하며 주눅들어 살기보다는 현재의 내가 행복하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다. 


설령 인생이 계획대로 풀리지 않아도 연연해하지 않는다. 인생은 계속되는 것이고, 나의 계획이 이루어진다고 해서 인생이 드라마틱하게 바뀌진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나를 행복하게 하는 습관들을 통해 만족스러운 순간 순간을 만들어나가는 것이라는 걸 이제는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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