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팅의 장면에서의 페미니즘
고백컨대 나는 페미니스트이지만 마초적인 남자들을 좋아했다. 그들은 “어차피 명백한 힘의 차이가 존재하는데도 불구하고” 내가 호신술을 배우는 것을 비웃었으며, 나는 그렇다고 한 적도 없는데 나를 “순수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여성으로 간주하였다. 그들은 무거운 우드 계열의 향수를 뿌리는 것을 좋아했으며, “여자친구에게 잡혀 사는” 본인의 주변 지인들을 우습게 생각했다. 그들은 나의 외모가 어때야한다에 대해 간섭했으며, 나의 화장 스타일이나 옷 스타일에 대해 지적하는 것에 대해 아무렇지 않게 생각했다. 그들은 남자답다는 것은 어떤 것인지에 대해 그들만의 확고한 정의를 가지고 있었으며, 여자친구의 아름다움에 대해 본인이 응당 주장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이 남자와 여자의 “근본적” 차이에 대해 얘기할 때마다 내 안의 작은 목소리는 이렇게 속삭였다. “이건 평등하지 않아. 너의 여성 인권은 지금 박살이 나고 있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들을 좋아했던 이유는 그들은 페미니즘적 기준에선 0점이었지만 문을 잡아줬고, 무거운 짐을 들어줬고, 차도에서 차가 올 때 나를 보호해줬으며, 데이트 비용의 70% 이상을 당연하게 지불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이 시기의 나는 데이트를 할 때 만큼은 내 여성 인권을 주장하는 것을 잠시 무시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사랑받는 느낌만 받을 수 있다면 말이다.
내 안에서 페미니즘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더 강해져서 무시하는 것이 어려워졌을 때, 나에게 데이팅은 매우 어려운 것이 되었다. 남자들에게 사랑이나 호의를 의미하는 제스처를 받는 것으로 인해 내가 그들과 동등하게 대우 받을 수 없다면 그런 제스처따위 집어던지고 싶었다. 그들이 나를 보호해야할 대상으로 여기는게 무지막지하게 싫었고 그저 불쾌했다. 남자들의 ‘매너’가 불편한 것을 넘어 내가 맞서 싸워야 하는 것이 되었다. 나는 남자가 먼저 문을 열어주기 전에 아주 다급하게 먼저 문을 열어재꼈고, 가방을 들어주겠다고 하면 단호히 거절했으며, 무조건 더치페이 또는 번갈아가며 식사값 계산하기를 고집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 나는 깨닫게 되었다. 나는 상대가 얼마나 나에게 관심이 있는지 또는 내가 그에게 호감의 감정을 느끼는 지와 같은 것에 집중하기 보다는 그와 내가 페미니즘적 행동 양식을 잘 지키고 있는지에 집중했다. 그리고 그것에 집중하면 할수록 나는 전투 태세가 되었고, 마음의 벽 또한 빳빳해졌다. 비단 마초적인 남자들 뿐 아니라 대부분의 남자들의 사랑 표현 방식은 ‘매너’였고, 이것이 그들이 호의를 표현하는 시그널이었다. 내가 이를 막아선 다음부터는 나는 상대의 마음의 크기를 느끼기가 어려웠고, 나의 사랑의 마음을 키우기도 어려워졌다.
남자의 ‘매너’가 끔찍하게 생각되었던 그 시기에 잠깐 키가 크고 체격이 좋은 연하남을 만났다. 나는 나보다 나이도, 연차도, 연봉도 적은 그의 처지를 고려해 계산을 할 때마다 자꾸만 “내가 낼게” 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그는 나를 애써 막아서지 않았다. 그래서 카드값이 굉장히 많이 나왔다. 어느 순간 현타가 왔다. 쓰벌, 내가 뭐하고 있는거지? 두 가지 사실이 분명했다. 1번. 내가 그의 Sugar Mommy를 자처할 정도로 그가 잘생기진 않았다. 2번. (이것이 더 중요했다) 날 사랑했던 남자들 중 내가 돈 내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했던 남자는 없었다.
내가 데이팅에서 얻어내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나는 평등한 관계를 원했지만 연애에서까지 투쟁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그저 사랑받고 싶었다. 그의 사랑 표현 방식이 진보적이지 않다고 해도 말이다. 물론 그가 타고난 섬세남이어서 가정적인 방식으로 나를 사랑해줄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것 또한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예를 들어, 반찬을 만들어서 냉장고에 가득가득 넣어주거나, 아픈 나를 걱정하며 쌍화차를 텀블러에 담아주거나, 아니면 나의 자취방을 뽀득뽀득하게 청소해주거나 하는 것들 말이다. 그런 사랑을 받게 된다면 나는 내가 질려버린 가부장제를 타파하는 기분이 들어 약간의 쾌감을 느낄 것 같다. 그러나 그가 섬세남이 아니라 할지라도, “남자는 이래야지” 하는 대한민국의 흔한 성 규범들에 의해 사회화된 평범한 남자일지라도 그만의 방식으로 나를 사랑해주길 원했다. 우리는 어쨌든 남자의 ‘매너’가 사랑을 표현하는 한 가지 방식이라는 것을 사회적으로 인지하고 있기에, 그가 내 짐이 무거워보일 때 들어주겠다고 제안해줬으면 좋겠고, 차도에서 나를 안쪽에 걷게 해줬으면 좋겠다. 나의 연봉과 그의 연봉이 비슷하더라도 밥을 사겠다고 제안해줬으면 좋겠다. 만약에 내가 무거운 짐을 낑낑대고 들고 있는 것을 본체만체 한다면, 오토바이가 내 곁을 가까스로 지나가는 것을 그대로 둔다면, 그리고 매번 더치페이를 고집한다면 (또는 내가 더 내는 것을 보고만 있다면) 나는 그의 사랑이 와닿지 않을 것이다. 반면 그가 사랑을 애써서 표현해준다면 나 또한 나만의 방식으로 그에게 사랑을 표현할 것이다. 그가 맛있는 파스타를 사준다면 나는 그에게 고기를 사먹일 것이고, 그가 운전을 한다면 나는 주유비와 주차비를 낼 것이고, 내 짐을 들어준다면 나는 길치지만 네이버 지도로 열심히 길을 찾을 것이다.
연애의 모습에서 우리는 정치적 함의를 완전히 지울 수는 없다. 그러나 무 자르듯 평등을 따지는 것보다는 마음 가는대로 사랑을 표현하는 것이 결국내가 지향하는 평등에 다다를 수 있는 최적의 방식인 것 같다. 마초남들과의 연애와 충격적인 금액의 카드값을 포함한 시행착오 끝에 내가 얻은 결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