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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그린 Aug 19. 2024

꽃무늬 원피스를 입은 건설사 CEO가 되고 싶다

나의 이야기

동일 제목을 가진 글을 써서 화제가 된 적이 있다. 한 때 카카오와 브런치 메인에도 올라갔고, 누적 기준으로 4.4만뷰를 찍었다. 당시에 나는 컨설팅 펌에 소속된 컨설턴트였고, 나의 생각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것이 조심스러웠다. 특히 클라이언트들이 볼 것이 우려되었다. 그러나 이제 나는 컨설팅펌으로부터 exit 하였고, 에너지 업계에서 일하고 있는 직장인이다. 따라서 내가 왜 꽃무늬 원피스를 입고 건설사 CEO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이제는 가설적 인물들이 아닌 솔직한 내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한 때 나는 내가 속한 남초 업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나의 여성성을 철저히 숨겨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첫 커리어를 4대 회계법인 컨설팅 펌의 M&A 조직에서 시작했다. 20명 남짓한 조직원 중 여자는 3명 밖에 없었다. 신입이었던 나는 내가 “여성인 것이 너무 부각되면” 프로페셔널로 인정 받기가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했다. 당시 우리 조직 뿐 아니라 펌 안의 다른 조직을 보더라도 성공한 여자들 중 꾸미기 좋아하는 여자들은 없었다. 다들 편한 플랫, 손질하기 쉬운 단발, 그리고 무난한 무채색 정장들을 입고 다녔다. 나는 내가 여성으로서 성공하고 싶다면 나도 그들과 같은 모습을 해야한다고 생각했다.

당시 내가 속한 조직의 리더들이 시선 처리를 잘 못하는 인간이라는 점도 한몫했던것 같다. 몸매가 조금이라도 드러나는 옷을 입고 가면 나에게 말하는 시간 5초당 몸을 보는 시선 1초를 견뎌내야 했다.

그래서 나는 회사에 무조건 넉넉한 통의 정장 바지와 헐렁한 셔츠를 입고 갔다. 몸매가 드러날 것 같은 같은 옷은 의도적으로 피했다.


답답한 셔츠와 통바지를 벗어던지고 싶어진 건 불과 2-3년 사이에 일어난 변화이다. 회계법인의 컨설팅 펌에서 글로벌 컨설팅펌인 MBB 중 한 곳으로 이직하게 되며, 조금은 더 자유로운 문화를 누리게 되었다. 이곳에서도 클라이언트 사이트에 출근할 때는 어느 정도 단정한 복장을 유지해야했지만, 오피스에 출근할 때는 무엇이든 입어도 되었다. 성과만 낸다면 무엇을 입던, 밥을 혼자 먹던 같이 먹던, 저녁에 운동을 하고 집에서 일을 하던 (컨설팅 펌에서 당연히 야근은 필수였다) 성과 외의 다른 것들은 중요하지 않았던 직장이었다. 이곳에서는 다양한 사람들이 각자의 개성을 드러낸 채 존재하였고, 여성 롤모델의 모습도 조금은 더 다양하였다. 나는 비로소 성공한 여성은 “여성성”을 탈피한 모습이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나는 예쁘고 독특한 옷을 좋아한다. 몸매가 드러나는 원피스도 좋아하고 비비드한 컬러의 블라우스들도 좋아한다. 주말이 되면 평소 입을 수 없던 과감하고 파격적인 디자인의 옷을 입으며 기분 전환을 한다.



추구하는 패션 스타일이 화려하다보니 “전형적인 컨설턴트”의 모습이 아니라는 코멘트를 간혹 듣는다. 네트워킹 모임에서 나를 처음 만난 낯선 이들은 내가 패션, 예술, 디자인 분야에 종사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나는 이러한 얘기를 듣는 걸 좋아한다. 머리를 치열하게 써야 하는 “경영 컨설턴트처럼 생겼다”는 말은 마치 “서울대 출신처럼 생겼다는 말”처럼 그다지 외모에 대한 칭찬이 아닌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아름다운 옷을 좋아하고, 신선하고 독특한 디자인을 좋아하는 취향을 가졌다는 것과 내가 가진 지적 욕구 및 커리어에 대한 성취욕은 완전히 별개다.


나는 예쁜 옷을 좋아하고, 서울의 트렌디한 스팟들을 섭렵하기 위해 주말에 이곳저곳을 쏘다니지만 소비재/리테일과 같은 말랑말랑한 산업은 딱 질색이다. 나는 말랑말랑한 B2C 보다는 딱딱한 B2B 비즈니스 (중공업, 제조업 등) 를 선호한다. 컨설턴트로 5년 이상 일하며 다양한 산업을 골고루 찍어 먹어 보았는데, B2C가 나와 맞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렸다. 클라이언트에게 방향성을 제시하고 전략에 대한 제언을 해줄 때, B2C는 분명하게 무엇이 맞는 길인지 제시하는 것이 어려웠다. B2C 산업에서 고객의 선호와 트렌드는 시시각각 변화하기 때문에, 무엇이 인기 있을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 이러한 모호함과 변동성이 싫었다. 반대로 B2B 산업은 시장의 생태계와 흐름이 명확하다. 기업 고객들의 니즈는 예측 가능하다. 제조업의 고객들은 기술력이 뛰어나고, 가격이 낮고, 수율이 높고, 납기를 잘 맞추는 기업들을 원한다. 1위 기업과 꼴찌 기업의 역량을 나누는 기준이 명확하고, 비즈니스 모델도 확실하게 손에 잡힌다.


또한 나는 신규 진입자가 쉽게 진입할 수 없는, 배리어가 높은 산업을 선호한다. 즉, 경험하면 할수록 전문성이 확실하게 쌓이는 산업에 종사하고 싶다. B2C는 해당 산업에 대한 전문적 경험이 없어도 모두가 소비자로서 이미 그 산업에 대해 어느정도 안다고 확신한다. 그래서 제언을 해주는 입장에서는 고충이 많다. 그러나 B2B, 특히 그 중에서 에너지 같은 분야들은 전문 용어도 많고 산업에 대한 경험 없이는 산업이 어떻게 워킹하는지 완벽하게 이해하기가 어렵다. 특히 그 중에서도 에너지는 앞으로 겪게 될 변화로 인해 전문성이 더 중요해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향후 석탄/석유에서 신재생으로의 transition을 하는 과정에서 여러 기술적 혁신이 일어날 것이고, 그에 맞게 새로운 사업 모델들도 등장할 것이다. 내가 지금 시기에 에너지 산업에 진입한다면 추후 신재생 등이 시장의 norm으로 자리 잡았을 시점에는 전문가로서 활약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고 생각했다.


마지막으로 나는 청개구리 심보가 있어 사람들의 예상을 뛰어넘고 싶었다. 패션/뷰티 업계에 종사하는 여자는 많지만, 에너지 업계에 종사하는 여자는 많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 해낼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나같은 사람도 에너지 같은 산업을 좋아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누군가는 덕업일치를 외치지만, 나는 취향과 지적 선호를 분리하고 싶다. 아름답고 “여성스러운” 옷을 좋아하지만, ”딱딱한 산업“인 에너지가 좋다. 주말에는 서울의 온갖 핫한 레스토랑, 전시, 영화, 카페, 와인바를 찾아다니지만 평일에는 지방의 공장들을 찾아다니는 이중 생활을 하고 있다. 그리고 나는 이 이중생활이 제법 마음에 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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