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 최악의 나쁜 남자
똑똑하고 욕심 많은 야망녀들은 왜 나쁜 남자와 사랑에 빠질까?
생각하면 할 수록 이해가 되지 않는 조합이다. 야무지게 본인의 인생을 개척해나가는 "야망녀"들이 이런 야망녀들을 홀대하는 나쁜 남자를 참아주다니. 아니 참아주는 걸 넘어서 그와 계속해서 그 toxic한 관계를 지속해나가고 싶어하다니.
분명한 것은 야망녀들은 목표를 달성하는 것을 사랑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녀들은 새롭게 달성해야하는 과제가 생기면 희열을 느낀다. 사랑을 뺀 다른 모든 영역에서 목표를 달성하는 것에 익숙해진 그녀들은 사랑 또한 목적 달성 과제로 여기기 쉽다. 따라서 너무나도 쉽게 마음을 보여주고 내어주는"착한 남자"보다는 길들여야만 하는 "나쁜 남자"에게 끌린다.
나쁜 남자들의 핵심은 "줄듯 말듯"이다. 그들은 그들의 유약한 모습을 보여주지만, 아주 가끔씩만 보여준다. 사랑을 해줄듯 말듯 하지만, 끝끝내 마음을 정말 주진 않는다. 조금만 더 내가 노력하면 마음을 줄 것만 같은 것이 나쁜 남자의 특징이다. 나쁜 남자들은 야망녀들의 목적 달성 의식을 자극하여 계속해서 노력하게 만든다.
왠만하면 힘들어서 포기하고 나가 떨어질 법도 한데 야망녀들은 원체 포기를 모른다. 그것은 마치 그들의 본능과도 같다.
나 또한 계속해서 나쁜 남자의 마음을 돌리는 것을 연애의 목적으로 삼았다. 나에게는 그것이 너무나도 자연스러웠다. 누군가의 사랑은 끊임없는 노력으로 얻어내는 것이 아니라는 걸 깨닫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렸다.
내 인생 최악의 나쁜 남자와의 연애를 회고해보면, 그와의 연애 기간동안 내 인생에는 행복보다는 불행의 비중이 훨씬 컸다.
그는 바람을 피거나 나에게 신체적 폭력을 행사한 적은 없지만, 너무나도 제멋대로 였고 상처 주는 말들을 일삼았다. 최악이었던 것은 그가 동굴에 들어가는 걸 취미로 삼았다는 것이었다. 그는 개인적인 문제들로 인한 감정이 증폭되면 소통의 동굴에 들어가 며칠 간 잠수를 탔다. 문제는 이런 시기들이 너무나도 예고도 없이 찾아왔다는 것이고, 그가 동굴에 한번 들어가면 내가 아무리 동굴 문을 두드려도 본인 마음이 내키기 전까지는 끝끝내 나오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나는 그와 사귀는 것이 너무나도 힘들었지만, 한편으로는 내가 노력을 하면 그가 바뀔 것이라는 생각을 떨쳐내지 못했다. 그는 나에 대해 아쉬운 점을 지적하는 것을 일삼았기 때문에, 내가 "옷을 더 잘 입게 되면" 그가 나를 더 사랑해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내가 그를 있는그대로 존중해주지 않는다고 가스라이팅했기 때문에 내가 "그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기다려주면" 그가 바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매력이 무엇이었냐고 묻는다면 가장 결정적인 것은 그의 사랑의 희소성이었다. 당시에는 나도 어렸었고, 지금은 모두에게 친절한 남자를 원하지만 당시에는 나에게만 친절한 사람을 매력적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모두에게 차갑지만 나에게만은 따뜻한 도시 남자라는 점, 나 뿐만이 그의 유약한 면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오는 희열이 있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열리지 않았던 그의 꽁꽁 얼어붙은 마음이 내가 특별해서 열린 것 같았고, 나에게 그런 그를 사랑해주어 그를 변하게 만들어야 하는 어떤 의무 (?) 같은 게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와 사귀는 내내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그가 나쁜 남자라는 얘기를 서슴치 않고 했다. 사람들은 내가 왜 그와 사귀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지금의 나도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나는 그와의 연애를 내가 극복해내야하는 어떤 어려운 과제로 인식했던 것 같다. 포기하고 이별할 수도 있었지만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의 선인장 같던 가시들이 무뎌진게 느껴졌고, 어두웠던 그의 그늘들이 서서히 밝아지는 것이 보였다. 과거에 내가 끝까지 밀어붙였을 경우 항상 빛나는 성과가 따라줬다. 그래서 나는 무지 불행하고 힘들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와의 연애의 대가는 명확했다. 그는 나의 자존감을 갉아 먹었다. 원래도 부족한 점 위주로 자아성찰을 하는 나였지만, 항상 나에 대해 아쉬운 점을 직설적으로 얘기하는 그로 인해 더더욱 내가 고쳐야 할 점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는 내가 가지고 있던 밝은 에너지를 앗아갔다. 그의 냉소적인 사고방식과 삶의 태도가 나의 일상 곳곳에 묻어나기 시작했다.
그와의 지독했던 연애는 (너무나 다행히도) 그의 충동적인 이별 통보로 드디어 끝이 났다. 우습게도 이별을 선고받은 그 순간, 소시오패스 마냥 내 입가에는 웃음이 번졌다. (아래 톰크루즈와 이혼한 뒤의 모습이라는 니콜 키드먼의 모습이 그때의 감정 상태를 매우 잘 대변해준다) 그와 사귀는 동안 나의 마음은 상처받아 피흘리고, 치유될 새 없이 상처받고, 또 상처받는 것을 반복하였다. 아픈 상처 위에 새로운 상처가, 또 새로운 상처가 소생될 틈 없이 생겨나 그를 향한 내 마음은 말라붙은 귤껍질 마냥 서서히 건조되었다. 그가 동굴에 들어갈 때마다 나는 그에 대한 마음을 애써 포기하고 차갑게 마음을 먹었다가, 그가 동굴에서 나오면 다시 그를 받아줬고, 또 다시 동굴에 들어가면 아픈 마음을 뒤로 하고 다시 마음을 굳게 먹었다. 그런데도 관성의 법칙 때문인지 이 순환참조를 자발적으로 끊어내기가 어려웠다.
그와 헤어지고 나서 나는 사랑은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드디어 깨달았다. 관계는 노력하는 것이 맞지만, 누군가의 사랑은 내가 노력으로 얻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 이후로 나는 내가 사귀는 사람이 나쁜 남자인지 아닌지를 판단하기 위해서 딱 한 가지 지표를 본다. 내가 그의 사랑을 얻어내기 위해 치열한 두뇌 싸움 또는 마인드 컨트롤 등 그의 제멋대로인 모습을 참아주기 위한 노오력과 한없는 이해심을 발휘하게 된다면 그는 나쁜 남자이다. 만약 그와의 연애가 쉽고 자연스럽고 내가 애쓰지 않아도 그가 나에게 충분한 사랑을 준다면 그는 나쁜 남자가 아니다.
성취지향적 야망녀들이 어려운 연애가 아닌 쉽고 행복한 연애를 하길 바라며 이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