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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수현 Dec 19. 2020

오, 나의 엄마!

‘엄마’라는 단어는 찰나의 순간에도 수많은 감정을 느끼게 한다. 엄마라는 단어를 떠올리는 순간 내 마음에는 걷잡을 수 없는 감정의 파도가 몰려온다. 아마 세상의 모든 자녀가 그렇지 않을까. 유난히 딸과 엄마의 관계는 애틋함과 사랑 외에도 답답함과 반항심도 느껴지는 애증의 관계인 것 같다. 딸들은 엄마처럼 살지 않겠다고 다짐하기도 하고, 엄마가 왜 저렇게 사는지 답답하지만 엄마를 힘들게 하는 것은 그냥 두고 보지 못한다. 나도 그렇다. 하루에도 몇 번씩 엄마가 불쌍하고 안쓰럽다가도 도대체 엄마는 왜 저러는 건지 이해도 안 되고 짜증이 치밀어 오르기 일쑤다. 


우리 엄마는 환갑이 넘은 지금도 여전히 마음에 10대 소녀가 살고 있다. 바람 한 줄기, 맑은 하늘, 단풍이 진 낙엽에도 감사하고 설레고, 지나가는 강아지는 행복한 걸까 걱정하는 사람이다. 여행 프로그램을 보며 이렇게 아름다운 자연은 누가 만들었으며, 언제 저 아름다운 곳을 다 가볼까 계획을 세우시기도 한다. 여리고 예민해서 주위 사람의 말 한마디에도 심장이 쿵 내려앉고 하루 종일 신경 쓰여서 아무것도 못하는 엄마는 우리 집에서 나와 제일 많이 싸운다. 엄마, 엄마, 엄마. 부를수록 마음이 아리고 코가 시큰한 그 이름.




문자 그대로 애증의 관계인 나와 엄마는 어릴 때부터 그랬다. 엄마보다 아빠를 더 빼어닮은 첫째 딸인 나는 엄마를 너무나도 사랑하지만 엄마의 기준을 충족하기는 어렵고, 싫었다. 엄마는 주변 사람들의 평가에 예민하게 반응했고 우리에게 너무나 엄했다. 특히나 우리 집에는 내가 중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 이모와 삼촌들이 항상 한 두 명씩은 함께 살고 있었는데 엄마를 나 혼자 독차지할 수 없어 어린 마음에 속상했다. 엄마는 언제나 출퇴근 시간이 다른 아빠, 이모, 삼촌과 어린 나와 동생의 식사를 시간대마다 챙겼고, 산더미 같은 빨래와 청소를 하루 종일 해야만 했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든 것을 잘 챙겨주는 것이 사랑의 표현이라 생각하는 엄마와 아빠는 이모, 삼촌들을 세심히 챙기느라 바빴다. 물론 나와 동생의 모든 것에 관심을 가지고 사랑을 쏟아주셨고, 이모와 삼촌들도 귀찮아하지 않고 어린 조카들을 마치 자식처럼 살뜰히 사랑해주셨다. 하지만 엄마와 병원놀이도 하고 싶고, 같이 간식도 만들어 먹고 싶고, 둘이 꼭 안고 낮잠도 자고 싶었던 내 소원을 들어주기에는 엄마가 해야 하는 일이 너무나 많았다. 집안일은 해도 해도 줄어들지 않고, 일을 한 것은 티가 나지 않지만 안 하면 너무 티가 나는 일이니까. 


그래서 나는 책에 빠져들었다. 동생은 말이 통하지 않고 행동도 굼뜬 아기여서 같이 놀기 싫었지만, 이모가 월급날마다 서점에 데려가서 사주는 책 속에서는 불가능한 일이 없었고 세상의 모든 흥미진진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책을 많이 읽으니 또래 친구들보다 어휘도, 상식도, 학습 능력도 좋았다. 그러니 엄마는 내게 공부를 잘하길 기대하기 시작했다. 부모님이 어린 시절에는 집안 형편에 도움이 되고자 중, 고등학교를 다닐 나이부터 일을 시작했기 때문에 공부를 하고 싶다는 내게 아낌없이 모든 것을 지원해주셨다. 사실 나는 시험을 위한 공부보다는 재미있는 분야를 공부하는 것을 좋아했는데, 성적이 부모님의 자신감인 우리나라에서 부모님이 자신감을 가지시길 바랐다. 공부를 열심히 해서 엄마, 아빠의 한을 풀어드려야지, 우리 가족과 이모, 삼촌 가족들까지 내가 책임져야지. 어린 나이에 책임감을 느꼈다. 우리 형편이 넉넉하진 않지만 부모님이 주위에 베푸는 삶을 살고 계시니 그에 대한 보상을 꼭 드리고 싶었다. 하지만 나도 여러 번의 수술과 그로 인한 심적인 방황을 겪으며 고등학교 때의 성적과 입학한 대학의 이름은 엄마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처음에는 자존심이 상했는데, 엄마의 바람과 나의 바람을 동일시해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내가 엄마의 기대대로 살길 바라는 엄마가 답답하고 짜증이 났다. ‘살면서 삶의 목표도 하고 싶은 것도 바뀔 수 있고, 나는 지금도 괜찮은데 왜 엄마는 자꾸 지난 일들을 곱씹으며 아쉬워하고 강요하면서 과거에 사는 거야? 현재의 나는 이 모습인데!’ 내가 병원에 입원 한동안, 퇴원하고도 몇 년을 함께 병원에 검진을 다니면서 엄마와는 지긋지긋하게 싸웠다. “엄마는 지금 가진 구닥다리 사상에서 벗어나야 해! 내가 생각하고 말하는 게 다 맞아!” 그 말에 엄마도 상처 받고, 말하면서 나도 엄마에게 미안했다. 엄마가 그렇게 생각하고 살게 된 것이 전적으로 엄마의 잘못만은 아니니까. 엄마는 이제 각자의 삶을 살아가는 40, 50대의 이모, 삼촌들에게 힘든 일이 생기면 자식처럼 챙기면서 걱정하고, 엄마와 인연이 있는 모든 사람들을 살뜰하게 챙기고 걱정하면서 스스로를 챙길 줄은 몰라 나와 계속 싸운다.




엄마는 3년 전 폐암 진단을 받고 수술을 받으셨다. 그때 엄마는 인생에서 두 번째의 큰 상실을 경험했다. 내가 중학생 때 엄마를 끔찍이도 사랑하신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고, 4년 전 엄마를 너무나 잘 따르고 아껴주던 외삼촌이 돌아가셨다. 가족 중 엄마의 마음을 가장 잘 알아주고, 이모와 삼촌들을 데리고 살면서 엄마가 힘들 거란 걸 유일하게 먼저 위로해주던 두 사람이 하루아침에 갑자기 엄마를 떠났다. 특히 술을 너무 좋아했고 여러 가지 탈도 많았지만, 나와 동생을 낳을 때 회사에 출근했다 병원으로 오셔야 했던 아빠 대신 출산 가방을 꾸려 같이 병원에 갔던 외삼촌은 엄마에겐 아픈 손가락 같은 동생이었다. 삼촌이 병원 갈 때면 우리 집에 와서 함께 있었는데 엄마는 그때마다 썼던 삼촌의 이불도, 담배와 라이터도 버리지 못했다. 버리면 정말 삼촌이 기억에서도 지워질까 봐. 그리고 삼촌의 빈자리에 휑하게 바람이 스산하던 겨울 엄마는 건강검진에서 폐암 진단을 받고 혼자 울며 집에 왔다. 


수술 날짜를 결정할 때 겨우 막내 이모에게 이야기하고 같이 병원에 갔던 엄마는 그 날 병원에 다녀와서 우리에게 폐암 진단을 받았다고 털어놓았다. 그리고 나는 엄마와 둘이 홍콩반점에서 짜장면과 탕수육을 먹었다. 엄마는 마치 우리 둘의 마지막 식사인 것처럼 굴었고, 나는 그게 너무 싫었다. “엄마는 절대 잘못되지 않을 건데 왜 곧 죽을 사람처럼 이래? 촌스럽게! 나중에 이것보다 더 맛있는 거 먹어야지!” 그날도 짜증 내다 엄마와 싸우고 집에 돌아와서 혼자 이불속에서 울었다. 내가 수술받기 전에도 엄마는 이렇게 가슴이 무너질 것 같았을까. 왜 우리 엄마는 한 평생을 다른 사람들에게 마음을 쏟아주기만 하다 이렇게 병이 났을까 원망스럽기도 하고 엄마가 미웠다. 


다행스럽게도 엄마의 암은 심하지 않아서 수술은 잘 끝났고, 아직은 완치 판정을 받지 못했지만 건강을 회복했다. 올해 여름 엄마는 또 한 명의 마음이 통하는 바로 손위 언니를 암으로 떠나보내야 했다. 엄마와는 달리 이미 손쓸 새 없이 병이 깊어진 상태에서 1년 반을 투병 생활하시다 이모는 돌아가셨고, 엄마를 지탱해주던 버팀목 하나가 또 무너졌다. 하지만 이번에는 남아있는 이모의 가족들을 챙기며 마음을 추스르는 엄마의 마음은 얼마나 엉망일까. 




올 한 해 재택근무를 하면서 폐가 아픈 엄마가 코로나 바이러스에 감염되실까 봐 너무 걱정되기도 했지만 엄마와 서로의 가장 깊은 마음을 마주하는 시간을 보낼 수 있어 참 감사했다. 하루 종일 밖에 나갔다 들어오는 가족들은 말로만 알았던 엄마의 외롭고 세상에서 가장 숨 가쁜 하루를 매일같이 지켜보며 비로소 엄마에게 짜증 내지 않고 엄마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안아드릴 수 있게 되었다. 그동안 하고 싶은 것, 갖고 싶은 것, 먹고 싶은 것도 꾹꾹 누르고 가족들에게만 헌신하느라 마음에 맺힌 게 많아 둘이 있으면 두런두런 옛날이야기를 하신다. 엄마는 그때 마음이 이랬어, 네가 들어주니 마음에 응어리가 좀 풀린다 하시는 우리 엄마. 환갑이 넘었지만 아직도 어린애 같은 딸들의 밥을 매일 차려주고, 하루 종일 청소하고 빨래하고 설거지를 하면서 종종걸음 하다가도 아침은 아빠가 하시니 저녁엔 꼭 아빠에게 따뜻한 음식 차려주고 싶으시다며 요리를 하시고, 동생들이 걱정돼 사과라도 한 박스 생기면 꼭 동네 한 바퀴를 돌면서 이모와 삼촌들에게 나눠주고 오신다. 마스크를 벗고 자유롭게 밖에 나갈 수 있는 날이 오면 가장 먼저 엄마가 좋아하시는 <한국 기행>에 나오는 풍경이 멋진 곳에 단 둘이 가서 옛날이야기가 아닌 앞으로의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이제는 엄마라고 부르면 코끝 찡한 눈물 대신 함박웃음만 지을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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