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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홍기 Dec 25. 2020

설민석 씨에게 수상록을 권함

지식을 가르치는 이들을 위한 르네상스 인간, 몽테뉴의 조언


설민석에게 휴식을 권함


설민석 씨가 연일 인터넷에 회자되고 있습니다. 지금껏 그가 방송이나 유튜브에서 해온 강의에 담긴 틀린 내용을 지적하는 기사나 반박이 주가 되고 있습니다. 오늘 이 글을 쓰는 것은 그가 조금은 자신의 과신을 돌아보고, 쉼을 가졌으면 하는 마음에서 입니다. 저는 르네상스의 문인이자 철학자, 몽테뉴를 좋아합니다. 수상록이란 책으로 우리에게 친숙한 에세이란 단어를 유행시킨 장본인이죠. 불어로 Essai 란 '체험하고 시도하는 것 일체'를 뜻합니다.


그가 살았던 시대는 종교개혁과 종교전쟁이 일어나던 때였습니다. 한눈에 봐도 편협한 광신의 시대에서 온건한 정신을 안고 살기란 쉽지 않았을, 절대적인 하나의 가치관이 지배한 시대에 상대주의적 가치관을 견지하며 보편적 인간에 대한 성찰을 모색했다는 점. 그런 점에서 몽테뉴의 글은 작금의 한국사회에도 울려주는 바가 큽니다. 몽테뉴는 불안과 권태스러움에 빠져 볼멘소리만 하는 지식인이 아닌, 보편적 인간의 원형이 추구해야 할 길을 보여주었던 사람입니다. 인간의 우정과 관습, 종교, 도덕, 여행, 교육, 죽음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주제를 중심으로 섬세한 관찰에 토대를 두고 '어떻게 살 것인가'를 말했던 인물이죠.


저는 그가 쓴 수상록을 마흔 살이 되면서 읽었고, 오랫동안 그 책을 곁에 두고 읽고 있지요. 인간은 결국 자신이 경험한 것, 그것을 통해 알게 된 것의 범위를 넘어서기 위해 실험과 시도, 검토, 반복적인 훈련을 할 때라야 삶의 주인공이 된다는 것을 그를 통해 배웠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설민석 씨의 팬입니다. 이번 글을 통해 그가 조금은 변화를 모색하는 계기를 갖게 되길 바랍니다. 몽테뉴의 수상록에는 이런 글이 등장합니다. 설민석 씨를 위한 글이다 싶어 번역을 입말로 고쳐 인용해봅니다.


"우리에겐 자신이 가보고 온 지방을 개인적으로 말해주는 지정학자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이 학자는 팔레스티나를 보고 왔다는 걸 앞세워 세상의 모든 다른 지역을 이야기할 특권을 가져야 한다고 여긴다는 게 문제입니다. 그것도 아주 당연히요. 저는 사람들이 저마다 자기가 아는 것을 쓰고, 알고 있는 만큼 다른 문제에 관해서 써주기를 원합니다. 왜냐하면, 이런 분들은 다른 문제에 대해서는 누구나 아는 정도밖에 모르지만 강이나 샘물의 성질에 대해서 만큼은 특별한 지식과 경험을 갖추고 있을 수 있기 때문이죠. 그런데 이런 분들은 자신의 작은 영역의 지식을 널리 퍼뜨리기 위해 물리학 전체를 설명하려는 야심을 보입니다. 이런 악습에서 여러 가지 많은 혼란이 생긴다는 점을 생각해봅시다"


몽테뉴는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을 남에게 이야기하는 사람이 갖추어야 할 미덕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나아가 자신의 논리를 정당화하기 위해, 속칭 말빨의 힘을 싣기 위해 논리를 전개하는 과정에서 과장과 허위의 요소를 담는 점을 경고합니다. 우리 사회에는 수많은 영역의 멘토와 전문가가 있습니다. 이들에게는 한 가지 특성이 있는데 자신이 알고 있는 세계를 넘어, 너무 지나치게 자신의 관점으로 모든 걸 포장하려는 우를 범한다는 것이에요.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습니다. 그가 역사의 그랜드 마스터란 칭호로 방송에서 불리는 것, 사실 이건 방송국의 편집인 걸 알기에 이런 부분으로 불편하다고 느끼진 않습니다.


언론이 띄워주니 자기도 모르게 과신하게 됩니다. 삶의 무늬를 인문이라 한다면, 그중 작은 무늬 하나를 겨우 읽어내는 이론을 세상을 통으로 이해하는 렌즈처럼 만들려는 욕망을 갖는 것. 지식인들은 자꾸 이 덫에서 자유롭지 않았습니다.  이는 몽테뉴가 살던 때나 현재가 다르지 않습니다. 자신의 지식이 자칫 빠질 수 있는 허위와 과장의 덫에서 자유롭지 않은 것이지요. 하나의 특정 이즘 ism으로 모든 담론을 해체하고 재구성하고 싶은 마음, 갈아엎고 싶은 욕망은 시대를 불문하고 튀어나옵니다. 최근 고대 이집트 역사를 강의하다가 호되게 비판을 받았고, 음악의 역사를 거론하며 재즈 Jazz 부분에서 동일한 지적을 받았습니다. 자신의 강점이라 할 한국사 강의에서도 이런 실수는 너무 잦아서 변호를 하기가 힘든 수준이 되었습니다.


저는 설민석의 연극적 프레젠테이션을 좋아합니다. 그는 역사를 가르치는 선생님으로서, 고시 준비의 일환으로 역사수업을 준비하는 이들에겐 흥미로운 캐릭터 그 자체였습니다. 그가 일반인이 지루하게 받아들이는 역사를 '흥미로운' 관심의 대상으로 만들어 준 것에 대해서도 감사합니다. 그러나 역사란 방대한 테마를 한 인간이 과연 다 안다고 자부할 수 있을까요? 패션사를 가르치는 제게도 방송과 언론은 툭하면 패션의 모든 것을 질문하곤 합니다. 패션사를 통해 풀 수 있는 공통된 부분이 있긴 하지만, 함부로 단언하거나 평가하는 일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긴 호흡을 가지고, 현재에 드러난 심리, 관행, 트렌드가 과연 역사적으로 어떤 뿌리를 가지고 있는가에 대해서만 말할 뿐입니다. 복식사도 텍스타일과 디자인, 색, 트렌드, 웨어러블 첨단 테크놀로지, 지속가능성, 의복의 생산과 소비, 실제 의복을 구성하고 재단하는 법에 이르기까지 각각의 영역이 하나의 우산 아래 모여 만든 거대한 역사의 세계입니다. 어디 이뿐인가요? 옷을 입은 인간의 마음, 섹슈얼리티, 각 나라의 의상까지 나아가면 머리가 아파요. 저도 이 중 아주 일부를 알 뿐이에요.


부디 설민석 씨가 자신이 가장 자신 있게 가르쳐왔던 분야를 '가르치는 기쁨'을 회복하고, 얕은 리서치와 공부로 모든 것을 설명하려는 자만심을 조금은 내려놓길 희망합니다. 언론이 당신을 띠울 때 항상 경계해 주세요. 그랜드 마스터란 칭호보다는, 역사의 길라잡이로, 역사가 얼마나 흥미로운 세계인지를 연기하듯 가르쳐온 당신의 장점을 다시 회복하고 바로 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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