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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유소가맥 Mar 07. 2023

스스로 떠난, 가둔, 뒤튼 나를 위한 구원

2023_13. 영화 <더 웨일>


1.
 영화 <더 웨일>은 주인공 찰리가 보낸 생의 마지막을 담았다. 몸무게 270kg이 넘는 거구의 사나이의 마지막 일주일을 관찰하며 그와 그 주변 인물들이 어떻게 구원받는지에 관해 조명한다. 주인공 찰리의 집(중에서도 거실 소파), 그리고 찰리 인생에서 남은 마지막 일주일, 그 한정된 공간과 시간 틈에서 대런 아로노프스키가 고찰한 인간에 대한 구원, 그것에 대한 이야기다.


 극을 이끌어가는 인물이 찰리이기 때문에 구원이라는 키워드를 찰리에게만 연관시키는 경우가 있는데 이렇게만 보기엔 영화가 바라본 구원이라는 키워드를 다소 납작하게 만든다는 생각이 든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주요 등장인물, 찰리, 앨리, 토마스, 리즈까지 네 인물이 각자의 방식을 통해 자기 구원, 폭력과 위선의 구원, 그리고 그 후 남겨진 사람들을 조명한다.


2.

 찰리, 몸무게 272kg, 혈압 234의 인물. 울혈성 심부전을 앓고 있는 그가 이 세상에 남아 있도록 허락된 시간은 일주일 남짓이다. 그가 세상을 떠나기 전, 가장 마음에 걸리는 것은 바로 딸 앨리다. 찰리는 자신의 제자 앨런과 사랑에 빠져 앨리가 8살이던 8년 전, 가족을 떠났다. (적어도 극에서 묘사되기로는) 그의 죄는 거기서부터 시작되는 것으로 보인다.


영화 <더 웨일>

 성실히 활동하던 종교로부터 배척당한 찰리의 연인은 결국 죽음으로 그 끝을 맞이하고 이젠 돌아갈 가족도, 함께할 연인도 없어진 찰리가 선택한 것은 사회와의 단절과 폭식을 통한 자기 파괴다. 찰리는 연인의 죽음 이후로 자신을 철저히 격리시킨다. 찰리가 죽기 전 앨리에게 연락하고, 앨리에게 에세이를 써주라고 했던 그 과정은 찰리가 스스로 선택한 구원 과정이다. 찰리에게 있어 구원이란 종교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가 행했던 인간과, 그 사이 관계를 통해서만 받을 수 있는 구원이다.


3.

 사회와 자신을 격리시킨 것은 찰리뿐만이 아니다. 방식은 다소 상이하지만 앨리 또한 찰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아빠가 떠난 이후, 모진 언행을 일삼고 학교에서는 정학당한다. 찰리가 물리적인 방식을 통해 자신을 격리했다면 앨리는 사회적 방식을 통해 스스로를 격리한다. 찰리가 자신의 몸을 폭식으로 학대한 것과 같이 앨리 또한 마리화나와 수면제로 스스로 학대한다.


영화 <더 웨일>

 찰리와 앨리는 서로를 통해서만 구원받을 수 있는 존재들이다. 사실상 둘은 현재 같은 행동을 통해 스스로 망가뜨리고 있는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찰리는 앨리의 방문과 에세이를 통해 구원받는다. 이와 함께 앨리는 찰리에게 '아빠'라는 호칭으로 부르며 다가선 것을 통해 스스로 주변을 강하게 틀어막고 있던 반사회적 행위들에서 벗어난다. 


 다만, 영화가 다룬 일련의 과정을 통해 앨리가 구원에 가까워졌을 거라 생각하지 않는다. 찰리가 안타깝게 묘사되는 것은 맞지만, 사실 그는 토마스 못지않게 이기적인 인물이다. 남겨진 인물들이 다시 한번 겪을 감정의 소용돌이들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정확한 판단을 내리기 어렵다.


4.
 남겨진 사람은 앨리뿐만이 아니다. 찰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준 유일한 사람, 바로 리즈다. 그녀의 사연 또한 굉장히 얄궂다. 찰리가 가족을 떠날 정도로 사랑에 빠졌던 인물은 리즈의 오빠다. 그녀는 죽은 오빠를 자신의 손으로 직접 수습했고, 극의 마지막 오빠의 연인이자 친구를 잃고 직접 수습하게 되었다. 그녀는 찰리를 살리기 위해 노력하는 간호사다. 동시에 역설적이게도 가득 쌓아 올린 치킨과 치즈가 잔뜩 들어간 샌드위치를 찰리에게 건네주며 자기 파괴를 돕는 인물이기도 하다. 죽을 것이 뻔한 친구의 죽음을 함께 앞당기며 그녀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영화 <더 웨일>

 리즈는 토마스에게 이야기한다. 그에게 종교는 필요치 않고 찰리를 도울 수 있는 것은 나뿐이라고. 그녀가 아무도 찾지 않는 찰리를 꾸준히 찾고 돕는 것은 같은 사람을 잃었다는 사실에서 오는 동질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종교를 통해 지켜주지 못한 오빠에 대한 강력한 반발이다. 찰리가 죽을 때까지 옆에서 지킨 것은 오빠에게 보내는 그녀의 속죄였을 것이다.


5.
 찰리와 정반대의 구원을 받는 인물은 토마스다. 어느 날 토마스는 선교를 목적으로 찰리의 집을 찾는다. '새 생명 교단' 소속인 토마스에게 게이 포르노를 보며 자위하던 찰리의 모습은 교단의 교리에 크게 어긋난 모습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심부전증 현상이 온 찰리를 위해 모비딕을 평가하는 내용의 에세이를 읽어준다. 토마스가 생각하기에 찰리는 구원받아야 할 불쌍한 인물일지 모르지만, 사실 이는 토마스 또한 마찬가지다.


 토마스는 사실 현재 교단 소속이 아니라 혼자 선교를 다니는 인물이다. 그는 자신이 속해 있던 선교단의 선교 방식이 자신이 지향하던 선교 방식과 달랐기 때문에 선교회의 돈을 훔쳐 도망쳤다. 심지어 앨리와 함께 마리화나를 피우기도 한다. 사실 극 중 토마스가 보여주는 행동에서 종교적으로 올바른 것은 거의 없다. 자신이 행한 비교리적 행동을 스스로 수정하지 않고, 선교를 위해 방문한 집에서조차 마약을 하는 그가 찰리에게 종교적 구원을 권하는 것은 꽤 모순적일 수밖에 없다.


영화 <더 웨일>

 선교를 포함한 그의 호의를 원하는 사람이 없는 상황에서도 끝까지 밀어붙이고 종교적 말씀을 전하려는 것은 사실상 폭력에 가깝다. 그러나 찰리가 펼쳐보지 못한 성경을 펼쳐보고 깨달음을 얻은 그는 나름대로 본인이 만족할 구원을 받는다. 어쩌면 그에게 어울리는 단어는 '위선'일지도 모른다. 정작 본인은 마약을 하면서 종교적 교리와 거리가 먼 이야기를 하며 몰아붙이는 찰리를 보며 괴로워하는 것은 그 위선을 부각한다.


6.
 앨리와 토마스 사이의 대화에 집중해 볼 필요가 있다. 토마스는 자신이 새 생명 교단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챈 앨리에게서 도망가는데, 그곳은 찰리가 들어가고자 했던 방(아마도, 앨런의 방, 혹은 둘이 함께 썼던 방)이다. 그곳에서 자신이 과거에 선교회의 돈을 훔쳐 도망갔으며, 돈도 다 떨어졌고, 더 이상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자신의 죄를 고백한다. 앨리는 토마스의 이야기를 녹음하고, 그의 가족에게 연락해 이 이야기를 알린다. 아이러니한 것은 결국 토마스의 문제를 해결한 것은 앨런의 폭로라는 점이다.


 사실 토마스는 민폐와 폭력의 인물이다. 그가 의도한 방식(선교)을 강요하는 것으로는 아무 도움도 주지 못하고 오히려 다른 사람에게 폭력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그 외의 방법, 심부전 증상이 온 찰리를 위해 에세이를 읽어주거나, 떨어진 열쇠를 집어주는 등 행동을 통해 도움이 된다.


 앨리는 이와 반대된다. 겉으로는 퉁명스럽게 굴고 남에게 상처를 준다. 하지만 그녀가 의도와는 다르게 도움이 되기도 한다. 아무렇지 않게 작성했던 에세이는 찰리가 죽기 전 꼭 읽어야 할 글이 되고, 토마스의 과거를 폭로한 것은 그가 가족과 화해하게 되는 단초가 된다. 앨리와 토마스는 사실상 서로를 비춘 반대의 거울인 인물이다.


영화 <더 웨일>

 이는 각자 찰리의 마지막을 대할 때 모습으로 증명된다. 토마스가 찰리를 마지막으로 찾아간 날, 몰아붙이는 찰리에게 당신이 역겹다고 진심을 이야기며 뒷걸음질 치지만, 앨리는 찰리의 마지막 순간에 '아빠'라고 말하며 처음으로 긍정하며 한 벌 다가선다. 도움을 준다고 하지만 결국 남에게 피해만 주고 자신만 만족할 구원을 받은 토마스와 피해를 주려 하지만 누군가에게 구원이 된 앨리. 두 사람은 사실상 대척점의 인물이다.


7.
 그런 면에서 앨런의 방에 들어가고, 성경을 꺼내 읽은 사람이 토마스라는 것은 인상 깊은 부분이다. 앨런의 방은 찰리가 가장 깊숙하게 숨긴 공간이다. 앨런의 방은 자신조차 함부로 들어갈 수 없는 집의 심층부와 같다. 찰리가 고이 숨기고 있던 공간, 열고 싶어도 열지 못했던 공간, 들어가고 싶어도 들어가지 못했던 공간이지만 토마스는 아무렇지 않게 열고, 아무렇지 않게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다, 심지어 토마스 본인의 치부를 숨기기 위해.


 사실 토마스는 찰리가 가진 고통에 관심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로 인해 옛 연인을 잃었다는 사실을 알고도, 그리고 찰리 스스로도 선교 같은 것은 필요 없다고 했음에도 폭력적으로 밀어붙이며 찰리가 종교를 통해 교리적 구원받길 원할 뿐이다. 앨런의 방은 찰리에게 차마 들어가지 못할, 닿지 못할 과거지만 토마스에겐 자신의 거짓에서 도망가기 위해 마음대로 침입할 그저 하나의 공간에 지나지 않는다.


8.
 찰리가 사람들에게 한 번씩 물어보던 것, 자신이 지금 역겹냐는 그 질문에 대한 가장 솔직한 답을 피자배달부 댄을 통해 행동으로 보게 된다. 이로 인해 자신이 견고히 쌓아놓은 사회와의 담, 그리고 아슬아슬하게 지탱되고 있던 자기 파괴의 증명에 대한 균열이 생기고 찰리는 폭주한다. 찰리가 미친 듯이 먹고 토한 뒤, 학생들에게 비속어까지 써가며 얘기한 것은 '제발 한 번만이라도 솔직해져라'다. 이는 댄의 행동으로 받은 충격에 대한 반작용이기도 하지만, 사실 그 누구보다 솔직하게 자신을 드러내지 못하고 숨어 살던 찰리가 스스로에게 하는 말과 같다.


9.
 영화 내내 반복해서 나오는 이야기는 엘리가 쓴 모비딕에 관한 에세이다. 이 에세이에선 소설 속 고래에 대한 묘사가 슬프다고 했다. 푸념뿐인 이야기 속 작가가 독자들에게 쉴 틈을 주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자기 비관적이고 고집 센, 죽음마저 고집을 부렸던 찰리의 인생에서 어쩌면 앨리는 쉼표였을지도 모른다. 찰리는 말한다. 자기 인생에서 단 한 가지라도 잘한 것이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다고, 물론 그 일은 딸 앨리다.


영화 <더 웨일>

 이와 동시에 앨리에게도 찰리의 에세이는 쉼표가 된다. 사실 제목과 찰리의 거대한 체구에서도 알 수 있지만 고래는 찰리를 의미한다. 찰리가 가족을 떠난 이후 내내 원망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을 앨리에게, 영화 속 일주일은 쉼표와 같다. 찰리가 삶의 마지막, 쓰고 싶은 어떤 것이든 솔직하게 쓰라고 한 것은 모비딕에서 고래를 묘사하는 파트처럼 앨리에게 이 순간을 묘사하며 삶의 쉴 틈을 주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덧붙여 찰리는 앨리가 소설 속 등장인물처럼 되지 않도록 끊임없이 이야기한다. 넌 아름다운 사람이라고. 찰리가 죽은 뒤 앨리 또한 스스로를 구원했을지는 모른다. 다만, 찰리라는 고래를 포용한 앨리는 고래가 죽은 뒤에도 허무에 빠지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https://movie.daum.net/moviedb/main?movieId=162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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