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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유소가맥 Dec 27. 2022

살아보지 못한 시대에 대한 향수를 느낀다는 것

2022_02. 영화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

1.

 로맨틱 코미디 영화를 좋아한다. 로맨틱 코미디에는 간질거리는 뭔가가 있다. 물론 한창 찌든 얼굴로 멍하니 화면을 바라보며 '어쩌라고' 내지는 '잘들 논다'는 생각을 할 때도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사랑'이라는 감정은 사람을 무장해제 시키는 힘이 있다. 어느 장르가 아니겠냐만 로맨틱 코미디는 특히 전형적인 플롯이 있는 편이라고 생각하는데 이를 부정 않고 받아들이면 꽤 너그러운 마음가짐으로 영화를 감상하게 된다. 덜 공격적이게, 더 너그럽게 영화를 보면 피로감도 적고 오히려 산뜻하기까지 하다. 가끔 한번 극장에 걸리는 로맨틱 코미디 영화가 내 기대를 배신할지라도 '언젠가는'하는 마음으로 끊임없이 찾고, 기대하고, 실망하더라도 다시 품는 걸 보면 로맨틱 코미디를 향한 내 감정은 단순히 '좋아한다'보다는 '사랑한다'에 가깝지 않나 생각한다.


2.

영화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

 나에게 최고의 로맨틱 코미디 영화는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다. 로맨틱 코미디에 대한 사랑은 이 영화부터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제목 그대로 해리와 샐리가 우연찮게 몇 번 만나게 되고 또 우연찮게 친구가 되고 마침내 서로의 마음을 깨닫고 연인이 된다는 아주 평범한 내용의 영화임에도 이 영화를 사랑하는 이유는 이 영화에 내가 사랑하는 모든 것이 있기 때문이다.


3.

 어릴 적 자주 보던 케이블 채널이 있다. 한물 간 미국 드라마나 영화를 들여와 방영하던 채널이었는데 덕분에 내 나이대 친구들은 예능 프로그램 자료 화면에서나 봤을 법한 <맥가이버>를 직접 시청할 수 있었다. <해리포터 시리즈>의 해리보다 <마법소녀 사브리나>의 사브리나가 더 익숙한 마법사였고 <어벤저스>보다 <두 얼굴의 사나이>에 나온 헐크가 더 친숙했으며 <모던 패밀리>보다 <못 말리는 유모>에 나온 가족에 더 소속감을 느끼기도 했다. 이렇게 어릴 적부터 간접적으로 나마 8, 90년대를 느끼다 보니 비록 그 시절을 직접 경험하지 못한 나이임에도 그 시대에 대한 향수를 갖게 되었다. 내가 가진 대부분의 취향, 그러니까 내가 사랑하는 것은 바로 그곳, 8090에 있다.


4.

 요즘 아이들은 모르겠지만 VHS, 그러니까 비디오테이프를 빌려보던 시절에는 '되감기'라는 것이 있었다. 단순히 이전 장면을 보려고 뒤로 몇 초, 몇 분 돌리는 개념이 아니라, 이미 한번 재생한 비디오테이프를 다시 보기 위해서 테이프를 처음으로 감는 것을 말한다. 영상을 보기 위해 '재생 버튼을 클릭한다' 외의 물리적인 준비 작업이 필요하다는 것은 요즘 사람들이 받아들이기에 조금 어색한 개념일 수 있다. 그러니까, 영상 매체를 접하기에 이만큼 간편한 시대가 되어버렸다.


 같은 맥락으로 요즘 아이들은 '쾌청'이라는 것도 모를 것이다. 가끔 비디오테이프를 쾌적하게 재생하기 위하여 일종의 청소를 해준다는 개념으로 재생하는 테이프인데, 테이프를 재생시키기 위해 테이프를 재생시킨다는 것이 생각해 보면 좀 웃기지 않은가? 빗자루 질이 잘 되는 바닥을 만들기 위하여 빗자루 질을 하는 것과 크게 다를 바가 없지 않은가.


5.

 클라우드와 스트리밍의 시대인 지금에야 VHS가 구시대의 유물이지만 어릴 적 나에게는 아주 감사한 매체였다. 마음만 먹으면 세상 모든 사람들과 연락하고 심지어 누군지까지 알 수 있는 시대에 사는 나는 <유브 갓 메일>에서 보여준 전자우편 서비스의 설렘을 알긴 힘들다. 개인 휴대폰이 없으면 본인 인증조차 할 수 없는 시대에 살면서 수화선이 짧아 아예 전화기 본체 자체를 들고 방 안을 빙빙 돌며 통화하는 그 모습을 공감하기는 꽤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 집에선) 꽤 마지막까지 버티고 있었던 VHS는 케이블 채널에서 만났던 8, 90년대를 직접 경험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매체였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되감기'나 '쾌청'은 내가 겪어보지 못한 8090과 나를 잇는 일종의 매개체였다는 말이다. 물론 OTT 서비스를 통해 다운로드할 필요도 없이 쉽게 영화를 볼 수 있는 요즘, 굳이 VHS를 다시 사용하진 않겠지만 가끔 그리울 때가 있다. 물론 그것들은 불편한 것이지만 그러면 어떤가,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물 흐르 듯 이루어진다면 훗날 되돌아봤을 때 그것들이 생각나지도 않을 것이다. 친구들과 깔깔거리며 나누는 추억 얘기도 대부분 누군가의 실수나 잘못인 경우가 많다. 그러니까, 그 시절의 낭만은 어떻게 보면 불편함에서 오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6.

 살아보지 못한 시대에 대한 향수를 느끼는 것은 특별한 일이다. 물론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는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훌륭한 로맨틱 코미디다. 하지만 내가 그 영화와 사랑에 빠진 가장 큰 이유는 그 영화에는 내가 생각한 8090의 모습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에는 그 시절 필름 영화의 질감이 있고 통이 넓은 바지가 있다. 수화기 선을 배배 꼬며 통화할 수 있는 유선 전화기가 있고 다시 보기 위해 되감아야 하는 VHS가 있다. 연말에 입 맞추는 연인이 있으며 그 시절의 맥 라이언이 있다. 요컨대 이 영화에는 그 시대의 낭만이 있다. 이 영화에서는 내가 경험해본 적이 없는 그 시대의 냄새가 난다. 나는 그 냄새를 맡고 싶다.




https://movie.daum.net/moviedb/main?movieId=10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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