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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유소가맥 Jan 26. 2024

그들이 누린 짧은 백일몽에 비해 그 숙취는 꽤 지독하다

2024_04. 영화 <어나더 라운드>

1.

 영화 <어나더 라운드>는 키르케고르의 시와 그 청춘을 보여주며 시작한다. '청춘이란 무엇인가? 하나의 꿈이다. 사랑이란 무엇인가? 꿈의 내용이다.' 곧이어 술을 진탕 마시고 게워내는 젊은 이들을 비추어준다. 다소 한심하게 까지 보이는 그들의 모습을 최대한 활기차게 묘사한다. 그들의 청춘은 그렇다. 그리고, 모두의 청춘은 그렇다. (그것이 설사 술이 아닐지라도) 청춘은 낭비되는 시간의 연속이다. 언젠가 얻을 하나의 성공을 위한 숱한 실패의 연속이며, 또다시, 언젠가 맺을 하나의 사랑을 위한 숱한 이별의 연속이다. 그리고 앞선 시와 같이 청춘은 꿈이다. 누구나 알 듯, 꿈은 언젠가 끝나기 마련이다. 평생 잠에서 깨지 않는 방법은 죽음 밖에 없다. 하지만 내 의식을 각성과 수면 상태 사이 그 어디쯤에 놓아주는 방법이 한 가지 있다. 바로 술이다.


2.

영화 <어나더 라운드>

 고등학교 역사 교사 마르틴은 친구 니콜라이의 생일을 맞아 마련한 식사자리에서 연거푸 술을 들이켜다 "내가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 모르겠다"며 눈물을 흘리며 친구들에게 고민을 털어놓는다. 매일같이 바빠 얼굴조차 보기 힘든 아내, 같은 집에 살고 있어도 관심 없는 아이들, 열정 없이 출퇴근 시간에 오다니기만할 뿐인 학교, 그런 자신을 무시하는 학생들, 그리고 그 상황 속에서 권태의 늪을 헤어 나오지 못하는 자기 자신까지. 눈물을 흘리는 것이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다.


 다음 날, 마르틴은 니콜라이가 이야기해 준 핀 스코르데루의 이야기를 떠올린다. 노르웨이의 철학자이자 정신과 의사인 스코르데루는 '인간의 혈중 알코올 수치가 0.05% 부족하다'며, '혈중 알코올 농도가 0.05로 유지되면 더 느긋해지고 침착해지고 음악적이고 개방적으로 변한다'라고 주장했다고 한다. 혈중 알코올 농도 0.05면 와인 한두 잔 마신 상태 정도니, 어렵지도 않다.


영화 <어나더 라운드>

 시작은 주인공 마르틴이었다. 몰래 가져온 술 한 병으로 시작된 실험은 곧 네 중년의 실험으로 판이 커진다. 시작은 그럴듯하다. 실제로 네 인물들은 전에 없던 삶의 열정이 생긴다. 학교에서도, 가정에서도 그들의 모습은 긍정적으로 변해가기 시작한다. 문제는 술이란 언제나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가속화된다는 것. 그들은 그들 스스로 정해놓았던 두 가지 규칙, 혈중 알코올 농도 0.05%와 저녁 8시 이후 금주의 선을 넘기 시작한다.


3.

 영화 <어나더 라운드>의 네 인물, 마르틴, 니콜라이, 페테르, 톰뮈는 삶의 열정을 잃은 중년 남성이다. 그들은 청춘이라는 꿈에서 깨어난 지 오래다. 그들은 어릴 적 그들의 열정을 되찾기 위해 다시 꿈을 꾸기로 한다. 표면적인 그들의 목표는 삶의 권태를 이겨내는 것이지만, 그 속내는 지난한 세월을 역행해고자 하는 시도다. 다시 말해 그들이 술을 마시는 이유는 술을 매개체로 청춘(의 열정)과 다시 이어지고자 하는 욕구다.


영화 <어나더 라운드>

 네 중년 남성의 직업이 고등학교 선생님으로 설정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그들은 스스로 생업을 놓지 않는 이상 필연적으로 잃어버린 무언가를, 그리고 이를 노력 없이 누리고 있는 누군가를 매일같이 확인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잃어버린 삶의 열정과 총기를 가진 누군가를 보며 씁쓸해하고, 본인의 삶과 대비시키고, 그들이 잃은 것을 충만히 가진 누군가가 자신을 한심하게 바라보는 것을 견뎌야 한다. 그들이 진행한 혈중알코올농도 실험은 단순히 자신감 잃은 중년 남성의 느지막한 치기가 아니다. 야속하게 흐르는 시간과 비참함을 배가시키는 야속한 환경이 만들어낸 필연에 가깝다. 물론, 이마저도 결국 주당들의 변명거리일 뿐이겠지만.


4.

 의지와 상관없이 가속화되는 것은 술뿐만이 아니다. 나이가 들 수록 시간은 빠르게 흘러가고, 이는 우리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 시간과 술이 가진 속성의 공통분모는 네 친구들을 다시 똑같은 상황 속으로 밀어 넣는다. 성공적이라 여겼던 그 모든 실험 결과는 0.05%의 선을 넘자 거짓말처럼 사라진다. 친구 톰뮈는 세상을 등진다.


영화 <어나더 라운드>

 어쨌든 시간은 흐르고, 젊음 또한 모든 사람들에게 평등하게 사라진다. 그 근본적인 대전제 속 젊은 이들과 술판 벌인 중년 남성들의 차이점은 없다. 그저 '누구의 꿈이 더 빨리 깨느냐'만 있을 뿐. 때문에 그들이 술에 과하게 취해 벌인 그 모든 추태들은 단순한 주사가 아니다. 젊음에서 늙음으로 가는 시간, 그 긴 기간을 짧게 농축시켜 보여줬을 뿐이다. 그렇기에 영화 초반 마르틴이 눈물을 흘리며 내뱉었던 "내가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 모르겠다"는 대사가 이 시점에 다시 나왔어도 무방했을 것이다.


5.

 키르케고르의 시처럼 그들이 닿으려 했던 청춘은 결국엔 꿈이다. 꿈은 언젠가 깨기 마련이다. 마르틴이 잠시나마 닿았던 청춘은 너무나 쉽게 깨어버린다. 그들이 꾼 꿈의 유통기한은 짧다. 술이 취해있는 동안만 유지될 뿐이다. 길었던 음주가 끝난 뒤, 그들에게 남은 것은 청춘도, 열정도 아닌 그저 숙취뿐이다. 그들이 누린 짧은 백일몽에 비해 그 숙취는 꽤 지독하다.


6.

영화 <어나더 라운드>

 톰뮈를 떠나보낸 친구들은 졸업생들의 축하 행렬을 마주친다. 마르틴은 학생들이 건넨 술을 마시고 한바탕 춤을 춘다. 다시 한번 영화의 처음으로 돌아가보자. 네 중년의 실험은 영화 초반, 술을 들이켜는 젊은 이들이 겹쳐 보이는 것은 마냥 우연이 아니다. 그들이 실험을 통해 겪은 죽음과 상실은 오래전 그들이 겪었던 젊음의 반복이다. 그 많은 것들을 겪고, 숱한 상실을 겪은 끝에 무언가를 깨달은 그의 춤은 격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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