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병
뚱뚱한 병과 홀쭉한 병과 목이 긴 병과 삼각형으로 좁아지는 병과 뭉툭하게 굽어지는 병과 입구가 갑자기 좁아지는 병과 대가리가 네모난 병과 몸통을 커다란 종이로 감싼 작은 병과 파란 몸통을 드러낸 병과 비슷한 색을 품고 어깨동무하는 병과 먼지가 가득 쌓여서 더 이상 투명하지 않은 병과 너와 내가 나눠 마시는 이 병과
말캉한 대화와 어그러지는 조명과 흐릿하게 뭉그러지는 너와 나의 대화들이
기어코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이 밤과.
시인들이 술을 좋아해서
이래서 시인들이 늘 취해 있구나
그래서 시인들이 늘 술을 찾는구나
샘솟는 두서없는 글감들이
홍수처럼 몰아치는 글귀들이
이토록 우울한 행복을 완성시켜 주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