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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킬러 Nov 07. 2019

내가 술을 좋아하는 이유

김혼비 <아무튼, 술>


금기의 빗장이 갓 풀린 대학 새내기 때부터 나에게 '술'이란 모든 인간관계에 없어서는 안 될 윤활유였다. 첫 만남의 서먹함을 깨 주는 것도, 익숙한 관계의 친밀함을 돈독히 유지시켜주는 것도 모두 술자리였으니까. 날이 좋으면 좋아서 마셨고, 비가 오면 비가 오니까 마셨다. 하지만 나의 음주는 직장인의 회식을 정점으로 결혼과 함께 그 양과 빈도가 확연히 줄더니, 출산과 육아라는 긴 터널을 통과한 지금은 거의 연례행사 정도로 자리 잡아버렸다.


그런데 같은 과정을 거쳐 왔던 친구들 중에도 몇몇은 여전히 술을 잘 즐기고 있는 걸 보면, 난 원래 술 자체를 좋아하는 '애주가'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저 하도 어른들이 애들은 못 먹게 하니 '도대체 술이 뭐길래 그러나' 싶은 호기심으로 마셨고, 그렇게 술 마시는 것을 친구들과 어울리기 위한 게임의 머스트 해브 아이템 정도로 생각했던 것 같다.               


이런 내게 <아무튼, 술>이라는 제목의 에세이가 눈에 들어왔다. 최근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라는 책을 읽고 팬이 됐다는 독자들이 제법 있어 김혼비 작가의 글이 궁금했던 차, 읽던 책을 던져 놓고 냉큼 집어 들었다. 과연 듣던 대로다. 분량이 짧은 것도 한몫했겠지만 솔직 담백 재치만점의 글발 덕에 앉은자리에서 끝까지 다 읽어버리고 말았다.      






여자 축구를 비롯한 마이너 한 글감에만 관심이 많다고 모친이 한숨과 함께 뱉어낸 '비주류(非主流)'라는 말에, 20년간 가장 사랑해 온 술에 대해 글을 써 '주(酒)류 작가'라도 되겠다고 다짐하는 작가의 프롤로그로 시작되는 이 책은 열세 편의 술에 대한 짧은 글들로 이어진다.


작가의 '첫 술'의 기억과 과음한 후에 발생한 각종 에피소드를 읽으며 언젠가의 내 모습이 떠올라 웃음지었고,  오래오래 술을 마시고 싶어 건강에 신경을 쓴다는 그녀의 말에 역시 누구도 못말리는 '애주가' 임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술을 마시면 어떻게 될 지 빤히 알면서도 술을 마시는 술꾼의 운명을 미래에 기다릴 불행을 알면서도 그 길을 가는 영화 <컨택트>의 여주인공에 비유하고, 리베카 솔닛의 <걷기의 인문학>을 언급하더니 능청스럽게 '걷술(많이 마시지 않으려고 집까지만 걸어가면서 마시는 술)'이라는 신개념 음주법을 소개하기도 한다.  



무엇보다 만취 상태로 곧바로 건너뛰기에는, 술동무와 함게 서서히 취기에 젖어드는 과정이 주는 매력을 무시할 수 없다. 때로는 이게 내가 술을 좋아하는 이유의 전부 아닐까 생각할 정도로. 뾰족하게 깎아놓은 연필을 백지에 쓱쓱쓱쓱 계속 문지르다 보면 연필심이 점점 동글동글하고 뭉툭해지는 것처럼, 어른으로서, 사회인으로서, 그 밖의 대외적 자아로서 바짝 벼려져 있던 사람들이 술을 한 잔 두 잔 세 잔 마시면서 조금씩 동글동글하고 뭉툭해져가는 것을 보는 것이 좋다. 그래서 평소라면 잘 하지 못했을 말을 술술 하는 순간도 좋다.                                                                                                 
                                                                                                     - 마지막 글 '술로만 열리는 말들' 중에서 -



이 책의 마지막 글에 그 옛날 내가 술과 친하게 지냈던 이유가 아주 정확하고 멋지게 정리되어 있었다. 씁쓸한 첫 잔을 꿀꺽 삼키고 혀에 쓰던 술맛이 살짝 달아지기 시작할때쯤이면 눈꼬리가 스르르 풀리던 느낌, 그와 동시에 긴장하고 있던 마음의 경계도 조금 느슨해진다. 그 취기의 도움으로 쉽게 털어놓지 못했던 속상한 일들, 속으로만 몰래 키우던 설레는 감정을 슬그머니 꺼내놓기도 했었다. 그래서 김동률도 '취중진담'이라는 노래를 만들 수 있었던 거고, 그래서 다들 그 노래를 그렇게 좋아하는 걸 거다. 단지 너무 취해서 술이 술을 마시는 무아지경의 단계로까지 넘어가 급기야 치고받는 상황에 이른다거나,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생각나지 않는 필름이 끊기는 상태로 불안해 할 일은 만들지 않는다는 기본 원칙만 잘 지킨다면 말이다.


책장을 덮으며 다시 술이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와인 한 잔에도 졸린 눈을 하는 남편 생각을 하니, 최고의 술친구 함께 살고 있는 작가가 부러워진다.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작가와 마주앉아 소주병을 따고는 '똘똘똘똘'과 '꼴꼴꼴꼴' 그 사이 어디쯤 되는 첫 잔의 소리를 같이 경청하고 싶다. 혹은 각자 순대국집이나 족발집에서 혼술하다 우연히 마주친다면(김혼비 작가는 필명에 얼굴도 공개를 하지 않지만) 책 잘 읽었다고 전하며 쑥스럽게 손바닥 내밀어 하이 파이브라도 한번 받아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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