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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킬러 Apr 16. 2020

마흔 훌쩍넘어 맥주 한 잔

서효인 '서른 훌쩍넘어 아이스크림'  


서른 훌쩍넘어 아이스크림

                                                        서효인


우리는 아직
아버지는 아니고
어머니는 더더욱 아니고
할머니가 돌아가시기에 적당할 나이
책상 위에 놓인 청첩장의 디자인을 살펴 볼 나이
예쁘고 작은 종이에서 단서를 찾아
남의 삶 전반을 추리하는 나이
그럼 그렇지 그렇다면 대봉하는 나이

나는 오늘 저녁 좋은 아빠의 상징인
베스킨라빈스에 갔다.
단단하게 얼어버린 설탕덩이를 뜨는 아르바이트 학생의 손목을 애처롭게 여기는 나이지만,
카드를 내밀기 전 얼음처럼 차가워지는 나이이며,
포인트 적립과 사은품을 챙기며 드라이 아이스가 되는 나이이다.

초코릿과 녹차가 섞이고 가운데는 단단한데
한갓진 데는 녹기 시작한 나이가 됐다.
이렇게 얼마나 더 살아야 하나
이십 년 지나 삼십 년
나는 은행과 약속을 했다.
죽지 않기로 성실히 살기로
이 약속은 녹지 않는다.

동료의 조모상을 알리는 문자가 온다.
우리 할머니가 몇 살이더라.
남의 삶 전반이 가늠되지 않는 나이
우리는 단 것을 먹으면 혀가 간지럽고
쓴 것을 먹으며 혀를 긁는다.
건강을 위해 이렇게
내가 좋은 아빠다
죽지 않는 아빠다
노인의 빈소
모락거리는 연기
아이스크림이 녹고 있다.
드라이아이스는 제 할 일을 다하고
삼십 년의 장례를 준비한다.
삼가, 열심히 녹으면서







* 서효인 시인의 시를 따라 써 봅니다.



마흔 훌쩍넘어 맥주 한 잔


우리는 이제
어쩌면 할아버지께서
어쩌면 할머니께서
아직 살아남아 계시다면
장수하신다고 얘기할 나이
친구부모님의 장례식에 갈 나이

오늘 밤도 쓰레빠 질질 끌고
맥주 한 캔 사러 집 앞 편의점에 간다.
최저시급이 팔천원도 안 될 아르바이트생을
안쓰럽게 생각하는 나이지만,
수입 맥주 할인행사에 혹하는 나이이고,
휴대폰 할인카드를 챙기며
얼마를 아끼게 됐는지 계산하는 나이이다.

얼린 잔에 갓따른 맥주 위로 풍성하던 맥주거품이
조금씩 허무하게 사라지는 나이가 됐다.
이렇게 얼마나 더 살아지려나
통장을 스캔하고 지나가는 연금을
이십 년이 지나면  
국가는 내게 돌려주기로 약속했다.
그때까지 살아야
열심히 살아있어야
그 약속이 허무하지 않겠지.

동창의 부친상을 알리는 문자가 온다.
아버지는 요양원에 계시고


어쩌면 곧 발신인이 될 지도 모르는 나이
맥주 안주로 사 온 치킨 한 마리를
공부하는 아이의 간식으로 둔갑시킨다.
나는 좋은 아빠다.
건강하게 살 수 밖에 없는 아빠다.
장례식 식당 한쪽
따라 둔 맥주 한 잔 위, 거품이 사그러든다.


*최저시급이 오르기 전에 쓴 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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