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해방

by 데오잡

삶을 돌이켜보면 그랬다. 대단한 행운은 없지만, 소소한 행운은 잦은 편이다. 성질은 좋지 않지만 의리는 좋다. 주위에 사람이 많지는 않지만 곁에 있는 소수의 지인들은 진짜 좋은 사람들이다. (진짜 좋은 사람들만 나를 참고 견뎌 준다는 당연한 소리 하지 마시라. 그 쯤이야 나도 안다!) 기억력이 좋은 편은 아니지만 아주 가끔 드물게 좋을 때가 있고 심지어 그 덕을 볼 때가 있다.


검사를 받는 중에 남편은 회의가 있어 회사로 돌아가고 나는 통역해주시는 분과 나란히 앉아 사소한 얘기를 하면서 전문가들의 회의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미국에서 한인 동포를 처음 만나면 거의 98%쯤 비슷한 화제로 얘기를 한다. 미국엔 언제 오셨나요, 라는 주제인데, 이 주제는 은근 무례하지만 의외로 공통적이고 중요하지 않은 데다가 개인적으로 이미 여러 번(또는 셀 수 없이) 얘기했던 내용이라 화자도 청자도 편하게 얘기할 수 있는 주제다. 그날도 그런 쓸데없는 얘기를 했다. 통역사 분은 50대 정도로 보이는 다정한 분이셨고, 나는 그분의 다정함이 주는 평화로움에 감사했다. 아마도 그때, 자고 있는 아이를 안고 혼자서 기다렸어야 했다면 나는 꽤 지쳤을 것이다. 이민 1세대가 워낙 많은 미국은 통역 서비스가 보편화되어 있다. 특히 학교나 관공서, 은행, 병원, 보험사 같은 경우에는 통역에 대한 자세한 안내가 나온다. 확실히는 모르지만 아마도 경찰한테 걸렸을 때도 요청하면 가능할 걸. 그 와중에 요청할 정신이 있다면 말이지. 나중에는 불편해서 통역서비스를 취소했지만(예상하다시피 시간이 더 오래 걸림), 검사날과 첫 ARD회의 날에는 통역하시는 분을 요청했었다.


전문가들이 우르르 돌아오고 사무적이고 친절한 회의가 시작됐다. 아이는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할 수 없고에 대한 바쁜 요약정리가 시작됐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휘력 레벨 1-1인 내가 어떻게 'autism'이라는 단어를 알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단어에 깜짝 놀라서 나도 모르게 통역하시는 분을 바라보자 그분은 어쩔 줄 모르는 표정으로 머뭇거리면서 아이가 자폐아인 것 같다는 말씀을 하셨다. 그렇구나. 그래서 그런 거였구나. 충격이긴 했는데, 하늘이 하얗다거나, 노랗다거나 그렇진 않았다. 사실 좀 둔한 타입이라 그런 건지도 모른다. 잠시 중단됐던 회의는 가면 같은 미소와 함께 다시 이어졌다.


아이는 자폐와 언어 장애, 두 항목에 해당되어 3월부터 집 근처 초등학교의 특수 학급에 하루 3시간, 주 5일 등교하게 되었다. 두꺼운 팸플릿을 몇 개 받고 대여섯 장의 서류에 이니셜을 적고 사인을 했다. 살짝 얼빠진 채로 차로 돌아와서 남편에게 전화를 했다. 사고력 정지가 이런 건가, 하며 시계를 확인하고 첫째를 픽업하러 갔다.


집에 와서 아이들이 이층에서 노는 동안, 나는 구글에 autism, autistic kids, special education 같은 단어를 넣고 검색을 했다. 문득 아, 이제라도 알게 돼서 다행이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린 나이에 빨리 발견해서 치료를 받는 게 중요하다는 글을 읽었다. 검색을 하면서 차츰 생각이 정리되어 갔다. 발생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다, 유전적인 요인이 있다, 발달장애이지만 병은 아니기 때문에 완치라는 개념은 없다... 잘은 몰라도 자폐아에게 특화된 테라피를 받아야 하는 것 같았다. ABA 치료가 뭘까. 어릴수록 예후가 좋다는데, 아이는 이미 만 4살 반이었다. 특수 학급에서 하루 3시간으로는 좀 부족할 것 같았다. 불현듯 몇 달 전에 지역 한인 카페에서 본 특수아동 테라피센터의 광고글이 기적처럼 생각이 났다. 서둘러 게시글을 찾아 문의 메일을 보냈다.


남편과 얘기를 나눴다. 사람들은 늘 인과관계를 알기 원한다. 우리도 잠시 왜 우리 아이가?라고 생각했지만 분명한 원인을 알 수 없다는 말을, 말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가끔 만날 수밖에 없는 삶의 고비에서 탓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다면, 마음이 수월한가 아닌가를 생각해 보았다. 내 탓인가 네 탓인가를 밝혀내는 것은 인생에서 가장 쓸데없는 일일 것이다. 남편과 얘기하면서 좀 더 머리가 맑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이제 그동안 안개와 같이 우리 안에 은근하게 퍼져있던 불안은 없어졌다. 이제 우리는 아이를 도울 수 있는 방법을 찾으면 될 것이다. 대체로 삶이란 그렇다. 방향을 찾았다면 속도는 문제가 아니다. 뜻밖의 해방감이 신기했다.


문의 메일을 보낸 센터에서 답장이 왔다. 예전부터 나는 인복이 좋았다.

그리고, 이번에도 좋았다. 

매거진의 이전글1. 2019년 2월 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