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말쓰는 한국에서
미국에 온 지 3년이 지났을 무렵, 남편의 파견으로 한국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한국 사람이 한국에서 사는 그 당연함이 얼마나 편하고 행복하고 좋은 일인지. 낯선 도시였지만 친정이랑 가까웠고, 좋은 사람도 많이 만나서 좋았다. 게다가, 미국에서 살다가 남편이 주재원으로 오게 되어 잠시 들어왔다고 하면, 대부분은 신기함과 부러움의 시선으로 우리 가족을 보았다.
아이들은 영어 잘하겠네요, 나도 미국에서 살고 싶다.
그리고 다들 말했다,
삼년이나 사셨으면 영어 잘하시겠어요.
영어 못한다고, 진짜 못한다고 재차 말해도 사람들은 그저 내가 겸손을 떤다고 생각했다. 처음에는 나를 거짓되게 포장하는 느낌이 들어 몇 번이고 항변했지만, 당장 한국에서 취업을 준비하는 것도 아니고 매일 영어로 일을 하는 것도 아닌데, 나의 진짜 영어 실력 따위 정말 남들이야 어떻게 생각하던 말던이였다. 게다가, 평생 살면서 그닥 타인의 주목받을 일 없던 내게, 남편이 선물해 준 '미국에서 살다 왔고 미국에 곧 돌아갈 가족'이라는 평범하지 않은 배경은, 뜻하지 않게 많은 사람들의 호감을 샀다. 그리하여 나라는 사람이 간사해지는 순간은 의외로 빨리 찾아왔다. 곧 닥쳐올 가까운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나 걱정, 준비 따위는 진심 노상관이 되고 눈 앞에 펼쳐진 환장하게 좋은 시한부의 한국생활을 일단은 좀 즐기자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아침에 일어나 애들을 유치원에 보낸 뒤, 아파트 주민센터에서 한시간 반동안 운동을 하고 집에 와서 누워있다가 새로 출시 된 라면을 끓여먹었다. 동네 도서관을 돌아다니며 한국어로 된 책을 마음껏 빌려 읽고, 주에 한두번은 뷰가 좋은 커피숍에 가서 새로 만난 동네 아줌마들과 커피를 마셨다. 마트에 가서 신기하고 값싼 주방도구나 어린이 교육 교재 같은 것을 왕창 사서 아이들과 함께 놀았고, 민화를 배우러 가서 동네 예술가 사모님들과 몇 시간이고 그림을 그리며 수다를 떨었다. 남편이 쉬는 주말엔 더 바빴다. 한달에 한번은 부모님댁을 번갈아 방문했고, 미국에서 함께 지냈지만 이제는 한국에서 터를 잡은 친구들과 다 함께 가족여행을 갔다. 철마다 광고가 나오는 국내 여행지를 돌아다니고 치킨과 짜장면을 시켜먹었다. 만족스러웠고, 즐거웠다.
그리고 그렇게 꿈만 같았던, 신났던 시간이 다 지나버렸다.
남의 집 살이 하는 것 치고는 지나치게 많이 모았던 살림을 전부 처분하고 쓸데없는 것 들을 또 가득 사서 선편으로 미국집에 보냈다. 순식간에 거짓말처럼 우리는 다시 미국행 비행기를 타고 있었다. 비행기 안에서 나는 다시 하이바이를 중얼거리다 문득 '삼년이나 사셨으면 영어 잘하시겠어요'를 생각해냈다. 그렇구나, 이제 곧 사년이 되겠구나. 삼년이 사년이 되고, 오년이 되고, 십년이 되는 것이다. 나도 모르게 머리에 씌워진 긴고아의 압박이 느껴졌다. 한국에서 재미있게 살아 보고 나니 더더욱 절실해졌다. 다시 그렇게 찌질하게 살긴 싫었다. 여러번 생각해봐도 그랬다. 이제는 그렇게 살 순 없었다.
나는 마지못해 동네 수영 학원에 전화를 걸어 아이들 수업을 등록하고, 코스트코에 전화를 걸어 냉장고 배달일을 확인했다. 알아 듣는 것도 힘들었고, 대답 하는 것도 힘들었다. 상대가 내 말을 못 알아 들으면 내 목소리는 더욱더 작아졌다. 못 알아 들은 내용을 상대에게 다시 묻는 것, 내가 알아들은 내용을 상대에게 맞는 지 확인하는 것도 대단히 큰 노력과 용기가 필요했다. 통화 중 실수 한 번, 대화 중 실수 한 번으로 잠 못들고 괴롭게 이불 차던 밤들이 이어졌다. 어쨌든 뭐라도 하고 있다는 사실이 위로가 되기에는 나의 영어실력이 진정으로 너무 하찮았다. 아까 전화받은 그 사람이 나를 얼마나 바보같다고 웃기다고 생각했을까. 타인의 시선과 생각을 넘겨 짚고 과도하게 많은 자책으로 나 스스로를 짓눌렀다. 깊고 깊은 땅굴을 파던 그 때의 나에게 말해주고 싶다.
쓸데없는 걱정말아라, 사람들은 나에 대해서 그렇게 깊고 정성스럽게, 오래 욕해 주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