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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오잡 Feb 23. 2024

이렇게는 못 살아

빈둥대는 김에 미드를 봤다


미국에 온 지 어영부영 몇 달이 지나고 나는 이대로는 못살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응, 그렇지, 이지경으로는 못 살지. 돌쟁이 첫째를 집 근처 어린이 집에 반나절 보내고, 조금 떨어진 교회의 ELS 수업에 등록했다. 주 4회,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한시간 성경공부를 하고 한시간 생활영어를 배우는 수업이었다. 가서 앉아서 수업을 듣고는 있지만 뭔 말인지 대부분 못 알아들었기 때문에, 나는 자주 우울했다. 언어를 배운다는 것이 원래 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사람마다 습득의 능력이나 속도가 다르다. 나 같이 언어능력이 그다지 좋지 않은 사람, 문법은 1도 모르겠고 발음도 겁나 구린 사람에게 영어로 의사소통을 한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다. 미국에서 살아갈 가장 기본적인 언어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나에게 미국 생활 초반은 고통의 나날이었다. 스피킹도 문제지만 리스닝이 급했다. 어디선가 읽었던, 모국어가 아닌 언어는 뇌에서 소음으로 인식한다는 말이 생각났다. 그런가, 자동차/열차/선박의 경적소리나 공장의 기계 돌아가는 소리를 듣고 무슨 상황인지, 무슨 기계가 돌아가는 지를 알아야 하는 거구나. Netflix에서 영어 자막을 켜고 미드를 보기 시작했다. 


이렇게 시작한 미국드라마/영화 보기는, 쏟아져 나오는 한국의 그 수 많은 명작들의 유혹을 힘겹게 뿌리치며, 2023년초까지 10년간 이어졌다. 나는 죄책감과 부채감에 시달리며 한국어 컨텐츠를 멀리하고 영어 컨텐츠만 봤다. 응답하라시리즈, 태양의 후예, 도깨비, 육룡이 나르샤, 미스터 선샤인, 스카이캐슬, 부부의 세계, 나의 아저씨, 사랑의 불시착, 슬의생...알쓸신잡과 유퀴즈를 비롯한 서술할 수 없는 몹시 많은 예능...난 죄다 못봤다. 

10년을 버틴 나의 사소한 고집은 '나는 솔로' 13기에 아는 사람이 나오는 바람에 무너지고 말았는데, 덕분에 봉인해제 된 나의 욕망...그 뒤로는 더 글로리도 보고 나는 솔로 16기도 보고 하트시그널4도 보고 이거저거 다 보고 또 보고!! 재미난 거 왜 이렇게 많은 건데!! 요즘도 슈카형 때문에 매일매일, 크흠, 역시 자네야. 


10년을 했다면 제법 거창해 보이지만, 영어로 된 컨텐츠만 봐야한다는 강박에 아예 동영상을 멀리하였다는 의외의 효과가 있었다. 어떤 날은 3,4시간 동안 보기도 했지만, 한 두달은 아예 안보기도 했고. 한마디로 지지부진했다. 많은 사람들이 추천하는 것 처럼, 시간을 정해 자리에 앉아서 집중해서 보고, 자주 나오는 문장을 쉐도잉을 하거나 모르는 단어를 메모하고 찾아보면서 듣거나 했으면 지금쯤 영어 상급으로 잘하게 되었을지도 모르겠지만 나에겐 부지런함과 열정이 대단히 부족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순히 듣고 있는 것만으로도 도움이 됐다. 개인적으로는 일반적인 미국인들의 억양에 익숙해진 것이 가장 큰 소득이라고 생각한다. 하루 한 두시간, 십년이나 이십년쯤 하자, 나는 달팽이고 내 인생은 길다!라는 자세로 한다면 추천이다. 뭔 소리인지 못 알아 들어도 내용을 전혀 모르겠어도 쿨하게 지나갈 수 있는 무신경함은 필수다. 말을 전혀 못 알아들어도 보다 보면 재미있는 드라마와 영화가 많고 배우들 참 잘생겼다고. 가시적인 또는 수치화된 성과를 보여줄 수 있다면 진짜 멋있었을텐데, 슬프게도 나는 게으르고 무계획적인 인간이라 대충 뭉뚱그려 저처럼 게을러 터진 사람에게는 이런 방법도 괜찮습니다라고 말하는 게 최선입니다. 


분명한 건 안하는 것 보단 낫다는 것. 그렇게 듣기만 했음에도 나는 조금씩 그들의 억양과 속도에 익숙해졌고 인생초면인 단어들을 들을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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