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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경수 Aug 04. 2019

예민함은 유전이랍디다

“그래도 지구는 도는 걸” 갈릴레오가 일흔에 종교재판을 받고 나오며 한 말로 유명하죠. 당시 유럽은 왕권과 교회가 결합된 사회였고, 신이 창조한 우주의 섭리는 지구가 중심이요, 태양과 다른 행성들이 지구 주위를 돌고 있다는 천동설의 시대였습니다. 갈릴레오는 지구가 돈다는 지동설을 뒷받침하는 연구를 했는데요, 이것은 교회에 대한 반항이었죠. 지동설을 주장하는 다른 과학자가 화형에 처해지자 갈릴레오는 재판정에서 자신의 주장을 철회합니다만, 나와서는 저렇게 혼자 중얼거렸다는 겁니다.    


갑자기 웬 갈릴레오냐고요? 

저는 예민한 아이들에 대한 진실과 불이익이 갈릴레오의 그것과 유사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르게 감각・감정・사고하는 것이 다른 이에게 문제없이 받아들여진다면 굳이 진실을 밝히지 않아도 무방합니다. 따르는 불이익이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민감함은 타고납니다. 타인보다 민감함은 실재하는 진실이지만 그렇지 못한 다수에 의해 그 진실이 왜곡되기 쉽습니다.    


민감한 사람 연구의 선구자인 일레인 N. 아론은 자신의 연구에서 15~20%의 더 민감한 사람이 문화와 성별에 상관없이 어디에나 존재한다는 결과를 도출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인간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닙니다. 생물학자들에 의하면 거의 모든 종의 동물에서도 상대적으로 더 민감한 소수가 발견된다고 합니다. 이 소수는 미묘함을 잘 감지하고 진행에 앞서 멈추고 확인합니다. 강아지를 여럿 키우다 보면 호기심이 있는 대상에게 무조건 돌진하는 강아지가 있는가 하면 돌진한 강아지에게 나쁜 일이 생기지 않았음을 관찰한 후 합류하는 강아지를 볼 수 있습니다. 생물학자들은 동물계에서 더 민감한 소수의 집단과 그렇지 않은 다수가 존재하게 된 이유를 먼 과거로 올라가 추론해 보았습니다.     


초원에 사슴 무리가 있다고 합시다. 한 사슴은 민감하고 다른 사슴은 그렇지 않습니다. 민감한 사슴은 풀을 보고 망설이고 다른 사슴은 뛰어듭니다. 포식자가 없다면 다른 사슴은 풀을 획득합니다. 민감한 사슴은 배를 곯습니다. 이 과정이 반복된다면 민감한 사슴은 죽습니다. 반대로 포식자가 있다면 덜 민감한 사슴이 먹힐 겁니다. 그러나 무리 전체로 확대해 보면 두 개체가 섞여 있는 것이 무리 전체의 생존율을 높이는데 유리합니다. 이런 이유로 더 민감한 소수의 개체와 그렇지 않은 개체가 살아남은 결과가 현재 존재하는 개체 들일 거라고 추정합니다. 현재 동물들이 대부분 민감한 개체 15~20%와 그렇지 않은 개체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은 당시 환경에 적응하는데 이 구성이 유용했다는 의미도 됩니다.     


이런 차이는 초파리에서도 발견됩니다. 이 경우에는 유전자가 원인이라고 합니다. 식량 수집에 관여하는 특정 유전자를 가진 초파리는 식량이 보여도 멀리까지 가지 않으며, 이 유전자를 갖지 않은 초파리는 멀리까지 식량을 찾아 돌아다닙니다. 이 유전자를 가진 초파리는 더욱 민감하고 고도로 발달된 신경체계를 가졌다고 합니다. 물고기 실험에서도 저돌적인 물고기보다는 조용한 물고기가 덫에 덜 걸렸다는 결과가 있습니다.


일레인 N. 아론의 설명의 따르면, 사람의 뇌에는 행동에 앞서 할 것이냐, 멈춰서 확인할 것이냐는 시스템을 가지고 있는데 민감한 사람은 멈춰서 확인하는 시스템이 더 강할 것으로 추정합니다. 이 시스템은 뇌의 우반구가 활발하게 활동하는 것과 관계가 있는데, 예민한 아이들이 오른쪽 머리의 온도가 약간 높다는 연구 결과와도 관련이 있어 보입니다. 이 시스템이 하는 일은 앞서 설명한 사슴에게도 적용가능 합니다. 멈춰서 확인하는 시스템이 강한 사슴은 풀을 보더라도 곧장 달려들지 않으며, 행동 시스템이 강한 사슴은 바로 돌진할 것입니다. 멈출 것이냐, 돌진할 것이냐는 감지되는 정보의 양에 의해 좌우됩니다. 순식간에 많은 정보가 들어오는 사슴은 멈춰서 고려해야 할 사항도 많은 거죠. 사람뿐만 아니라 곤충・동물・어류에서도 더 민감한 개체가 존재함은 환경에 적응하며 살아남은 이전 세대로부터 유전된 결과입니다. 즉, 타고나는 것이죠.     


대부분의 다수는 이 예민함을 적극적으로 이해하려 하지 않습니다. 어려서부터 저는 잠을 잘 이루지 못해 등교시간에 맞춰 일어나기가 힘들었습니다. 예민한 사람의 활동적인 뇌는 밤에도 활동을 하기에 낮에 피로할 정도로 움직이거나 사고하지 않는 이상 숙면이 어렵습니다. 그런 줄도 모르고 매일 아침을 제때 일어나지 못하는 게으른 사람이라는 모친의 인증으로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학년이 바뀔 때마다 ‘그 처음’에 민감했던 것뿐인데 생활기록부에는 언제나 ‘내성적’이라는 증명이 따라다녔습니다. 저는 제가 정말로 게으르고 내성적인 사람인 줄 알아서 피곤해서 낮잠이라도 들면 게으른 제 자신을 비난하고, 내성적이지 않으려고 일부러 눈에 띄는 과한 행동, 지금 말로는 흑역사를 방출했습니다. 그렇다고 내성적인 성향이 나쁘다는 뜻은 아닙니다. 내성 혹은 내향, 외향은 심리적 에너지의 방향입니다. 내 안으로 향하는가, 나 밖으로 향하는가. 하지만 미국이나 우리나라는 외향성을 우대합니다. 우리들은 성향을 구분하는 이 말을 중립적으로 사용하기 보다는 문화권에서 습득한 가치를 담아 우열을 부여합니다. 핵인싸가 유행하는 것도 바로 이 맥락 아니겠습니까. 예민함에 대한 몰이해는 아이가 자신을 바로 알게 될 기회를 박탈하며, 그것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들 속에서는 자존감을 도둑맞는 불이익으로 이어집니다.    


때로는 예민한 아이의 요구에 적극적으로 부응하는 엄마를 보며 “아이가 엄마를 이겨먹네”라고 하는 평을 하는 어른들을 만나게도 됩니다. 특히 요구가 까다로운 예민한 아이들의 경우 봐줘야 할 편의의 양이 많다보니 그런 편협한 어른들을 만날 확률이 더 높습니다. 아이가 예민하든 그렇지 않든 아기라면 그 욕구는 충족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아기가 맺고 학습하는 최초의 대인관계요 대인신뢰도의 기준선이 되거니와, 무엇보다도 아기는 엄마를 지배하고 마음대로 조종하려는 고등한 지능을 가진 상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편안한 생존에 필요한 본능적 욕구를 표출하는 것뿐입니다. 필요한 것을 제때 해결 받으며 편안하게 자란 아이들은 부모에게 더 협조적입니다. 아이의 인지가 발달할수록 그에 맞게 욕구를 조절하는 법을 가르치면 됩니다. 아기 때부터 잘해줘서 버릇이 나빠질까봐 걱정하는 것은 비합리적인 신념입니다.    


태양이 지구를 돈다고 해서 화형에 처해졌어도 지구는 돌았듯이, 다수가 그 존재를 모른다 해도 과거로부터 살아남아 온 소수의 민감한 그룹은 여전히 활발한 우뇌활동이 일어나는 신체구조의 유전을 통해 존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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