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민경수 Aug 28. 2019

 기저귀를 왜 5세까지...

예민한 아이 난제, 배변(2)

아기가 두 돌이 되면 슬슬 주변에서 기저귀를 떼고 있다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기저귀를 얼마나 빨리 떼느냐가 아이의 발달 속도나 질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만 간혹 그렇게 여기는 많은 어른들을 만나게도 됩니다. 그런 분들은 기저귀를 떼는 일뿐만 아니라 뒤집기, 걷기 등 아이의 성장 하나하나를 다른 아이들의 그것과 비교하며 우위에 두려는 심리와도 결부됩니다. 아이들은 타고난 신체조건에 따라 발달의 시기가 다릅니다. 얼마나 일찍 걸었느냐 기저귀를 떼었냐는 그 순간에 드러난 사항일 뿐, 결국 어떤 시점에서 보면 아이들은 모두 잘 걷고 화장실도 잘 이용합니다. 특별한 장애나 방임과 같은 특수한 환경적 제약이 있지 않은 이상, 신체발달은 결국 나이가 차면 거의 비슷한 수준으로 수렴합니다. 특이점이 없는데 기저귀를 차고 초등학교에 등교하는 아이를 본 적은 없지 않습니까!    


인지가 더 발달해서 기저귀를 일찍 뗄 수 있다기보다는 방광의 크기나 타고난 괄약근의 운동능력에 따라 배변 조절에 개인차가 있습니다. 작은 방광을 타고난 아이들은 밤새 10시간 이상 잠을 자는 사이에 소변이 나올 수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밤 기저귀를 오래 차는 것이 오히려 도움이 됩니다.    


제 아들은 두 돌이 올 때쯤 밤 기저귀를 먼저 뗐습니다. 통잠을 자기 시작하면서 신기하게도 자는 동안에는 소변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방광이 크거나, 섭취하는 수분의 양이 많지 않거나, 괄약근의 기능이 좋은 편일 것 같습니다. 낮 동안에는 몇 번 바닥에 소변을 보기는 했지만 그럴 때마다 잽싸게 소변통을 갖다 댔더니 바닥에 소변을 봐서는 안 되겠다는 의식이 생기기 시작하는 것 같았습니다. 유아용 스탠드 소변기를 벽 한쪽에 뒀더니 스스로 가서 소변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대변만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대변은 반드시 기저귀에 보았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저조차도 보이지 않는 곳으로 가서는 서서 엄숙하게 힘을 주는 겁니다. 두 팔을 어깨 높이 위로 뻗어 탁자 같은 것을 잡고 고개를 숙이고는 진지하게 꼿꼿이 서 있는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더 아가였을 때는 기저귀와 엉덩이 사이에 변이 묻는 것을 개의치 않아하더니 커갈수록 자신의 신체에 변이 묻는 것이 싫은 것 같아 보였습니다.     


만으로 3세가 되자 아들은 이전의 자신에 비하면 폭발적으로 말을 잘하기 시작했습니다. 주어와 목적어 서술어가 모두 있는 어른의 문장을 구사하고 머리 크기에 비해 팔다리가 길어지는 것이 제법 자란 아이 같았습니다. 유치원 가방을 메니 아기가 아닌 어린이 같기도 했습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대변만은 기저귀에 보았습니다. 만 3세가 넘어가니 대변을 보고 싶으면 스스로 알아서 바지를 벗고 팬티형 기저귀로 갈아입은 후 구석으로 들어가 몸을 숨기고 일을 봤습니다. 마치 화장실을 입는 것 같은 우스운 모습이었습니다.    


변기로 변이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아이 자신도 빨려 들어갈까 봐 두려워서 그런가 싶어 방 안에 두고 앉아서 변을 보는 의자형 대변기도 사봤지만 아이는 절대로 이용하지 않고 기저귀를 고집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별 일도 아닌 일인데, 저는 만으로 4세가 되도록 기저귀를 떼지 못한 아이가 슬슬 못 마땅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일부러 기저귀를 사두지 않았습니다. 기저귀가 없으면 어쩔 수 없이 변기를 이용할 거라고 생각했으니까요.     


유치원을 마치고 돌아와 저녁 먹을 즘이면 대변을 봐야 하는 아이가 계속 참기 시작했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아이는 소변조차 시원하게 보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대소변이 모두 나오려는 상황에서 둘 중 하나를 통제한다는 것은 제가 생각해도 몹시 힘든 일일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는 계속 버텼습니다. 밤 11시가 되었고 아이 아빠가 퇴근하고 왔습니다. 아이 아빠는 아들을 차에 태우고 기저귀를 사러 나갔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대형마트가 아니고는 동네 슈퍼에서 기저귀를 구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11시 40분이 되자 편의점까지 서 너 군데를 들러 기저귀를 구했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그렇게 집에 온 아들은 결국 기저귀에 시원하게 일을 보고 잠이 들었습니다. 그 후로도 아들은 그 40개 정도 되는 한 묶음의 기저귀가 다 떨어질 때까지 자신만의 대변 루틴을 유지했습니다.    


만으로 6세가 돼 가는 아들은 현재 밖에서 대변을 보지 않을 뿐, 여느 아이들처럼 변기를 이용합니다. 어떤 일을 계기로 기저귀를 떼고 변기를 쓰기 시작했는지 조차도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기저귀를 떼는 일은 사소한 일이었습니다만, 당시에는 다른 아이들과 달리 더 오래 기저귀를 이용하는 것을 여유롭게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인지나 신체 발달에 이상이 없었기에 ‘기저귀에 대변을 보는 게 편한가 보다’라고 넘어가도 될 일을 좌변기에 수 분을 앉혀두고 못 내려오게 해서 울리기를 반복하고, 기저귀까지 구비해두지 않아 수 시간을 대변을 참느라 소변까지 찔끔찔끔 싸게 하는 참사를 빚었으니 미안한 마음이 듭니다.    


정말로 어떤 아이는 대변에 관한 한 타협할 수 없는 본능적인 무언가를 타고난 것이 맞는 것 같습니다. 그것을 억지로 억제하거나 통제하는 방식으로 조련을 하기보다는 그 특징을 가지고도 편안하게 생활할 수 있는 방식을 터득하게 하는 게 낫지 않을까 싶습니다. 남보다 오래 기저귀에 똥을 싸는 일로 바보, 멍청이라는 소리를 듣게 되고 그것을 내면화한다면 정말로 바보 멍청이가 될지도 모릅니다. 혹은 대변을 볼 때마다 그런 잔소리를 듣는다면 대변을 볼 때마다 습관적으로 수치심을 갖게 될 수도 있습니다.    


아들의 이런 대변 루틴은 가족들 사이에서 꽤나 흥미진진한 화젯거리였습니다. 그리고 시동생이 자신의 경험을 보탰습니다. 사실 본인도 중학생이 되어서야 학교에서 소변을, 고등학생이 되어서야 대변을 보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사실은 저도 30대 직장인이 되어서야 직장에서 대변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의외로 집에서만 대변을 보는 어른은 우리 주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아무래도 타고 난 무언가가 확실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 아이들이 이 특징을 가지고도 사회생활을 편안하게 잘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하지 않을까요? 더불어 긍정적인 자기상을 해치지 않도록 주의도 해야 합니다. 변은 적어도 하루에 한 번은 봐야 하는 중대하고도 잦은 사안이기 때문입니다. 

작가의 이전글 나의 대변을 알리지 마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