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민경수 Nov 03. 2019

그의 오디오는 예능 녹화 모드 중

_경계성 성격장애자의 불안과 위험한 애정 패턴

예능을 보고 있노라면 출연자들이 종종 그런다. “오디오가 물린다”, “오디오가 빈다”, “오디오를 채워야지” 등. 예능은 그렇다. 쇼 내내 쉴 틈 없이 재미있는 말들이 오간다. 출연자들이 오디오를 입담으로 채운 결과다.    


그는 마치 예능 출연자 같다. 잠시도 오디오를 비게 하지 않는다. 출연 프로그램은 <골목식당> 풍이다. 진행자가 출연자를 관찰하며 중계하는 식. 그는 진행자 쪽이다. 진행자를 제외한 출연자는 10명 정도로, 어린이가 5, 보호자가 5이다. 어린이 5명 중 1은 진행자의 자녀다. 어린이는 어린이대로, 보호자들은 보호자대로 뭉쳐 자리한다. 이때부터 그 진행자는 “오디오가 비지 않는” 꽉 찬 중계를 시작한다.     


중계의 주 대상자는 자신의 자녀다. 자신의 자녀가 다른 아이와 놀이를 하기에 발생하는 타자와의 접촉 내용을 끊임없이 묘사한다. “ㅇㅇ이가 뭐라고 말하니까 ◇◇가 웃네요.” “oo이가 뭐라고 했는데 △△가 표정이 안 좋네요. 우리 ㅇㅇ이가 하자고 한 놀이가 △△의 취향은 아닌 거지.” 어쩌고 저쩌고 어쩌고, 블라블라 블라... 중계의 요지는, 자신의 아이와 다른 아이들의 접촉점에서 자신의 아이가 여러분의 주의를 받을만한 악한 행동을 하고 있지 않음의 구구절절한 해명이다.     


해명의 진원지는 불안이 유력하다. 그 불안을 풀어서 말하자면; ‘남들은 내 아이의 의도를 악하게 해석할 것이며 그러면 싫어하게 될 것이다.’

불안은 전염된다. 하필 △△의 보호자가 불안 내성이 약하다. 곧장 △△를 호출해서는 꾸중을 한다, “친구가 하자는 놀이도 같이 해야 착한 아이지.” 꾸중을 듣고 시무룩해진 아이는 무리 속에서 잠깐 겉돈다. 그래도 진행자의 오디오가 비면 안 된다. 그녀는 자녀의 다른 아이와의 접촉점을 또 중계하고 해명한다.    


우리들의 집에는 현관이 있다. 그 현관문을 관계없는 자가 열고 들어오면 주거 침입죄에 해당한다. 그래서 우리는 내 구역이자 내 영역인 집 안에서 안락하고 편안하게 지낼 수 있다. 내 집 문을 아무나 가 불시에 열고 들어올 수 있다면 안락과 편안은 깨어지고 언제 누가 쳐들어올지 모른다는 불안에 휩싸일 것이다. 설령 현재 집 안에 나 혼자 있는 상태이더라도 말이다.    


사람도 그러하다. 하나의 사람은 하나의 집이다. 사람들 저마다는 독립된 인격체다. 사고체계를 가지고 감정을 느끼며 관철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다. 그 체계와 내용도 저마다 다르다. 우리는 이것을 ‘자아(自我)’라고 한다. 집에 현관이 있듯이, 자아에게도 현관 즉 ‘경계’가 필요하다. 나=자아와 타인을 가르는 경계는 그 안에서 내가 확실하게 안락하고 편안할 수 있도록 튼튼해야 하며, 때로는 기꺼이 타인을 초대하여 쌍방이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도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 자아는 ‘분화’로부터 성립된다. 인간의 아기는 성인의 지능을 가지고 태어나지 않는다. 거의 무의 상태로 태어나 주양육자에 의존하여 성장해간다. 즉 먹고, 자고, 배변을 해결하는 생존본능을 주양육자에게 전적으로 의지하여 해결하면서 점차 인지 및 운동 기능이 완성되는 식이다. 그래서 아기는 주양육자와 본인을 동일시한다. 하지만 스스로 정교하게 움직일 수 있고, 사고할 수 있게 되면서는 주양육자로부터 육체적・심리적으로도 떨어져 나가며 고유한 자아를 확립하게 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존재 자체로의 충분한 인정과 사랑을 받지 못하거나, 방치되거나, 과다한 침범을 받거나, 혹은 과잉한 관심을 받는 등 적절하게 자아의 경계를 확립할 수 있을 보살핌을 받지 못하면 경계 설정에 문제가 생긴다. 세계 보건기구(WHO)가 정한 국제 질병분류 성격장애 진단에서는 이를 ‘경계성 성격장애’라고 칭한다. 질병분류 기준 상에 있다고 해서 ‘암’과 같이 정확하게 가시적인 증상으로 판별할 수 있는 질병과는 조금 다르다. 정도에 따라서 의학적 처방이 요구되는 사람도, 혹은 누구나가 약간씩은 가지고 있는 심리적 상태일 수도 있다.    


자아의 경계가 튼튼하지 못하면 다른 사람의 사소한 말 한마디에도 쉽게 흔들린다. 그래서 감정의 기복이 심하다. 같은 사람일지라도 듣기 좋은 말을 해주면 ‘가장 좋은’ 사람이었다가 듣기 싫은 말이라도 나오면 ‘가장 나쁜’ 사람이 된다. 홀로 있기에는 불안하고 약하기에 친절하게 대해주는 아무에게나 급격하게 일체감을 느끼고 집착했다가 기대에 어긋나면 감정을 폭발한다. 분노 조절이 어렵다. 불안을 회피하기 위해 바쁘거나 탐닉한다. 바쁘게 움직이지만 근본적인 상처 치유를 위한 노력이 아니기에 바쁘지 않은 순간에 공허하거나 더 불안하다. 혹은 쇼핑이나 오락과 같이 말초적인 쾌락에 빠지기도 한다.  


문제는 암과 같은 질병은 가시적인 증상이 있기에 건강하게 생존하기 위해서는 증상 개선이나 완치를 위한 치료를 하게 되지만, 심리나 성격은 그렇지가 못하다는 점이다. 특히 건강하지 못한 심리나 비합리적인 사고체계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스스로가 그러하다고 자각하기가 무척이나 어렵다. 주변 사람들과 잦은 불화를 겪거나 사회생활에 문제를 겪는 등의 증상이 나타남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자신의 잘못이 아닌 상대방의 잘못이라고 여긴다.     


그래서 그 중계 쇼는 흥행했냐고요?

학원이 아니고는 아이들이 친구를 만날 기회가 희소하기에 자유로이 놀게 하고자 자리를 마련한 다른 보호자들은 그의 불안을 응대하거나, 궁금하지 않은 사유에 대한 해명을 들어주느라 피로했다. 이 프로그램은 출연자가 대체되거나 불참자가 속속들이 등장하면서 그렇게 폐지의 수순을 밟았다.

진행자였던 그는 그 후로도 자녀의 교육기관에서 다른 보호자들과 섞이게 될 때에, 때로는 △△보호자를 제외한 사람들과만 인사를 나누거나, 어느 날은 ▽▽보호자 하고만 인사를 하는 등 자신이 애정을 회수한 대상과 전폭 지원하는 대상을 확연히 디스플레이했다. 자아의 경계가 튼튼하지 못하면 그 애정도 위험하다.

작가의 이전글 그래서 제이홉의 팬이 됐다니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