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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경수 Nov 20. 2019

설마 분리불안도 타고나는 건가요?!(1)

예민한 아이의 사회성 고민(2)


아들이 걷기 시작하면서부터 산책을 꽤나 즐겼습니다. 그때마다 맞은편에서 모르는 사람이 걸어오면 제 뒤에 숨어서 다 지나가고 나서야 다시 걷기 시작했습니다. 한 팔 거리 안에 들어오는 아기들은 물어서라도 곁을 주지 않았습니다. 모르는 사람에 대한 경계가 강했고, 그런 모습은 점점 다른 사람들 앞에서 수줍어하는 모양새가 되어갔습니다.    


<대개는 웃었던>

그렇지만 아들은 대개는 웃고 있는 아기였습니다. 안면근육이 발달하지 않은 신생아 때를 빼고는, 그의 표정은 확연했습니다. 울거나 웃거나. 중간은 없었습니다. 산책길에 풀 한 포기만 보아도 웃고, 장난감을 가지고 놀아도 웃고, 간식을 먹어도 웃기만 하던 아기였습니다. 그런 아들의 웃음기가 싹 사라진 사건이 생겼으니, 바로 유치원 입학이었습니다.    


<입학식만 해도 웃었지>

입학까지만 해도 좋았습니다. 여전히 낯선 이를 경계하고, 얼굴만 아는 어른들에게는 인사를 건네기를 꺼려하는 예민한 아이였습니다. 그런데 입학식 날은 달랐습니다. 입학식을 마치고 나온 아들이 길에서 마주치는 모르는 어르신들에게 충분히 들릴만한 큰 소리로 “안녕하세요”를 건네는 게 아니겠습니까. 아들 자신도 유치원생이 된 자신이 꽤나 자랑스러웠나 봅니다.    


<그리고는 웃음을 잃었지>

유치원 입학은 만 3 세하 고도 6개월이 되던 무렵이었고, 아들은 그때까지 줄곧 집에서 저와 지냈습니다. 한 순간도 엄마와 떨어져 본 적이 없었습니다. 다음 날 본격적으로 유치원을 다녀오고 나서야 아들은 감이 왔습니다. 그것은 낯선 장소에서 낯선 아이들, 어른들(선생님)과 점심밥도 먹고, 낮잠도 자고, 놀이도 하며 엄마가 오는 오후까지 버텨야 하는 생전 처음 겪는 고통스러운 생활이었습니다. 아들의 작은 머리는 “그 사람들(선생님)이 나를 숨겨놔서 엄마가 찾으러 오지 못한 거야”라는 추론을 내놓았습니다. 엄마와 떨어져 있는 상황을 불가항력의 불행이라고 여긴 것 같았습니다. 마치 포로수용소에 갇힌 자유를 잃은 패잔병 같았지요. 하원을 하면 유치원을 가야 하는 내일이 올까 봐 잠들기를 무서워했습니다. 유치원 현관에서는 언제나 울었고, 선생님은 그런 아들을 ‘들고’ 교실로 사라지곤 하셨습니다.    


<그래도 주말에는 다시 웃더라>

그런 한 달을 보내고야 아들은 아침에 ‘들려서’ 헤어지지는 않게 되었습니다. 적응이라기보다는 포기 같았습니다. 반에는 아들과 비슷한 성향의 남자아이가 하나, 여자아이가 하나 있어 보였습니다. 같이 블록 쌓기를 했다며 그 남자아이 이름을 무척이나 언급했고, 그 여자아이는 낮잠을 자려니 엄마가 너무 보고 싶어 눈물이 났는데 토닥토닥을 해줬다고 했습니다. 아들은 아침마다 자신을 들고 올라가는 선생님을 나중에는 무척이나 따르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기억이 생생한데, 선생님에게 들려가던 아들은 눈물이 맺혀 붉어진 눈시울과 코끝을 하고는 그 처연한 얼굴을 선생님의 어깨에 힘없이 올려놓았습니다. 2학기가 되어서야 아들은 그제야 적응을 했고, 유치원을 가고 싶어 하지는 않았지만 저항은 하지 않고 다녔습니다. 유치원에서 매달 보내주신 생활사진에서 아들은 다시 웃고 있기는 했습니다.    


1년 과정을 수료하고 나니 아파트 재건축 문제로 유치원이 문을 닫게 되었습니다. 첫 사회생활의 고배를 1년 내내 마시고 있는 아들이 안쓰러워, 6세에는 유치원에 있는 시간이 가장 짧은 인근 병설유치원으로 전학을 했습니다. 9시에 등원해서 1시 30분이면 하원을 하는데도 아들은 유치원에 가고 싶다고 한 날이 없었습니다. 7세에도 여전히 일찍 하원을 하는데 유치원을 꾸준히 싫어하고 있습니다. 이유는 언제나 단 하나, “엄마가 보고 싶어.” 혹은 “엄마가 없는 게 싫어.”    


이쯤 되면 분리불안이 아닌가 걱정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론적으로는 안정 애착을 형성한 유아라면 30개월 즈음에 ‘대상항상성’을 획득합니다. 즉 엄마와 얼마 정도는 떨어져서도 편안하게 있을 수 있어야 하는데, 아들은 처음 입학한 42개월부터 70개월인 지금까지 엄마와 떨어지기를 슬퍼하고 있습니다. 그런 아들이 유별난 것인가, 아니면 잘 못 키워서인가를 고민하며 같은 반 학부형들에게 물어보니 두 아이가 아들과 같은 상황이었습니다. 새벽마다 영아산통을 앓으며 울었다던 여자아이와 제 아들과 수 조작 영역에서 놀길 좋아하는 남자아이였습니다. 여아는 중학생인 오빠가 둘이나 있지만, 7세 후반인 지금도 엄마 없이 오빠하고만 있는 건 불안해합니다. 그 아이의 학부형은 그런 아이를 배려해서 학원과 같이 엄마와 떨어져야 하는 활동은 시키지 않으십니다. 다른 남자아이는 자신이 원하는 학습활동만 골라서 학원을 몇 군데 다닙니다. 아들은 1주일에 한 번 하는 문화센터 미술수업을 9개월이나 다니다가 그만두었고, 좋아하는 친구 따라 간 태권도장도 3주 만에 포기했습니다. “수업시간에 무서운 일이 생길 것만 같다”는 게 이유였습니다. 학원을 좋아하지 않을 뿐, 이 아이들은 모두 놀이터에서는 아이들과 섞여 잘 놉니다. 특히 여자아이는 다정다감하여 친구들로부터 인기가 많습니다.     


다른 아이들과 다를 바가 별로 없는데, 다른 아이들은 아무렇지 않게 다니는 유치원이나 학원을 가길 극도로 싫어하거나, 엄마와 떨어지지 못하는 것은 정말로 문제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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