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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봇 Jun 16. 2020

07. 신발만 하나 바꿨을 뿐인데...

B급에서 A급이 되고 싶어졌다.

07. 신발만 하나 바꿨을 뿐인데... 분홍색 하늘을 마주하다니.


 최근 신발장에 있던 오래된 새하얀 운동화를 세탁소에 맡겼다. 꼬질꼬질 때가 타 거뭇거뭇하고 누렇기도 한 이 새하얀 운동화는 이틀 정도 지나 갓 샀을 때의 새하얀 운동화가 되어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새하얀 운동화가 다시 때 탄 운동화가 되기 까지는 불과 1주도 채 걸리지 않았다.


 나는 회사를 갈 때, 셋업을 곧잘 입는 편이다. 회사가 복장규정에 엄격하여 정장스타일을 고수하기 때문도 아니고 사원은 정장을 입어야지라는 윗사람의 눈초리 때문도 아니다. 그와는 반대로 우리 회사의 복장 규정은 비즈니스 캐쥬얼이라고 쓰고 자율이라고 읽을만큼 자유롭다. 셔츠와 슬랙스 조차도 강제되지 않고 티셔츠와 청바지를 좋아하는 아주 자유로운 판국이다. 그럼에도 내가 셋업을 입는 이유는 별 건 아니었다.


 셋업을 입었을 때 나쁘게 느껴지는 부분이 하나도 없어서.


 그런 셋업을 입고 출근하는 때에는 언제나 신발장에서 단화를 꺼내 신었다. 셋업에는 단화를 신었을 때 가장 예쁘다는 생각으로 한동안은 신발을 살 때에 단화만 사곤 했다. 덕분에 신발장에는 여러개의 단화가 있어 골고루 신고 다니기에는 좋았으나, 그 중에는 아직 길들여지지 않은 신발들도 있었고 그 신발을 신은 날에는 발에 문제가 생기곤 했다. 오래 걸으면 발이 아팠고 새끼발톱이 두어 번 정도 깨지기도 했으며, 걷다가 툭 튀어나온 바닥의 타일에 발코가 걸려 찧였을 때에는 발톱 사이에서 피가 나기도 했었다. 며칠 간은 발도 아파 기분이 좋지 않았고, 퇴근하고서는 침대에서 다리를 주무르는 시간이 많았다. 헬스를 끝내고 폼롤러로 다리를 마사지 하는 시간도 길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단화는 포기하지 않았다. 


 왜냐면 셋업에는 단화가 잘 어울렸으니까.


 하지만 그런 생각은 꽤 오래가지는 못했다. 부정적인 습관은 결국 곪아 문제가 되듯, 내 발에도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깨진 새끼발톱의 날카로운 부분이 네번째 발가락의 옆을 찔러 굳은살을 만들어내었고 이윽고는 작은 티눈이 되었다. 그 티눈으로 인해 느껴지는 이물감과 통증으로 결국은 단화와 셋업을 포기했다.


 그렇게 셋업이 아닌 편안한 복장으로 다닌 지 사흘 정도, 아이러니하게도 지난 번 집청소를 하면서 상당수의 여름 옷을 내버렸던지라 절대 수의 부족으로 마침내 얇은 셋업의 차례가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평소와는 다르게 썩 편해보이지는 않는 셋업을 입고 오른쪽 발에 단화를 신다가 이윽고 벗어버렸다. 대신 하얀 운동화를 꺼내신었다. 문 옆에 있는 전신거울을 마주보자 새하얀 운동화는 베이지색 셋업과 제법 잘 어울렸으며, 캐쥬얼 정장이라는 이름에 맞게 조금 더 가벼워졌고 무엇보다 발은 편안했다.


"하얀 운동화라 셋업에도 잘 어울리네."


 제법 만족하며 현관문을 열고 출근을 시작했다. 길을 걷다보니 평소와 대비하여 발걸음도 무겁지 않았다. 단화는 운동화보다는 무게가 있어 발에 좀 더 힘을 쓰는 느낌이 있었지만, 운동화는 그러지 않아도 되었다. 오래 걸어도 발이 아프지 않았으며, 무엇보다 티눈에 대해서는 신경쓰지 않아도 될만큼 통증은 없었다. 회사에서 신발을 벗어 통풍을 시켜줄 일도 적었다. 퇴근을 하고도 다리는 붓지 않았고 헬스를 끝나고서 다리를 폼롤러로 오래 풀지 않아도 되어 대신 라크로스볼로 어깨를 마사지하는 시간이 길어졌다.


 나는 그날 밤 단화를 신발장에 모두 넣었버렸다. 그리고 흰색 운동화 두켤레만 현관바닥에 두었다. 다음 날 다시 나는 셋업을 입었고, 단화 대신 운동화를 신기 시작했다. 이유는 아주 대단했다. 


 운동화를 신었을 때, 좋게 느껴지는 부분이 너무 많아서.





 오늘은 10,000걸음을 가뿐히 걸었다. 퇴근하고 친구를 만나 저녁식사를 했고, 청계천을 걸었다. 오늘은 바람이 좋았고 기온도 적당했으며, 하늘에는 구름이 많아 노을지는 하늘빛은 분홍 빛이 감돌았다. 아무 생각 없이 걷다 보니 세운상가가 보였고, 나는 그 세운상가 앞 다리에 적혀 있는 문구를 읽었다.


 당신의 발을 멈춰, 세운.


 세운 상가면 종각에서부터 꽤 멀리걸어왔구나 싶어 발을 보았더니 하얀 운동화가 있었고 발을 꼼지락 거렸다.


"다리로 올라갈까?"


 친구의 제안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철제계단을 올라가니, 평소와는 다른 청계천의 풍경을 마주했다.


[분홍빛으로 물든 하늘과 청계천의 조화로 20분간 서 있었다.]


 평소의 단화였으면 오래 걷지 못해 분홍빛 하늘을 맞이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나는 이로써 내 운동화를 좀 더 사랑하게 되었고, 오늘도 신어 때 탄 운동화를 내일도 다시 신을 것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운동화를 신었을 때, 좋은 일이 너무 많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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