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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효신 Mar 22. 2021

베를린

왜 모든 걸 떠나보낸 후에야 아름다웠던 것을알게 될까?


 2015년 3월 20일, 24살의 나는 독일에 왔다. 

나는 이루어지든 안 이루어지든 촘촘히 계획 짜는 일을 즐겨하는데, 인생에 있어 큰 결정이라고 할 수 있는 유학을 별다른 구체적인 계획 없이 또한 꽤나 뜬금없이 그냥 갔다. 독일에 갈 수 있는 기회가 불현듯 생기자 마음 깊이 꼭꼭 눌러놓은, 그림을 그려야겠다는 열망과 지지부진한 현실의 권태가 엉겨 2-3주 정도 갈 채비를 하고 순식간에 떠나왔다. 지금 와서 드는 생각은 오히려 아무것도 알지 못했기에 단번에 떠날 수 있었던 것 같다. 

 공항에서 가족들과 인사를 하고 생애 첫 장기 비행에 허둥지둥 독일행 비행기에 몸을 실은 날, 그땐 전혀 몰랐지만 다시 돌아올 도착지가 불분명한 아주 긴 여행의 시작점에 나는 발을 내디뎠다. 


 독일에 오고 첫 1년은 꽤나 즐거웠던 것 같다. a, b, c부터 배우면서 알음알음 독일어로 얼굴이 붉어지는 수천번의 경험에도, 매일매일의 하루가 어학원과 화실의 반복이었어도 지금까지 전혀 다른 환경의 삶에 나는 설레어했다. 하지만 늘 그렇듯이 시간은 지나고 새로움은 익숙함으로 변했고, 가벼웠던 여행의 마음에서 살아내어야 할 삶이 보이자 그동안 감춰졌던 속상한 마음들이 하나 둘 기웃거렸다. 한국에서 받은 1년짜리 워킹홀리데이 비자는 설레었던 마음과 함께 끝이 나고, 나는 이방인으로써 때마다 이 곳에 있는 목적을 철저히 증명해야 했다. 어학 비자, 유학생 준비 비자 총 2년의 기간 안에 학생임을 입증하지 않으면 더 이상 머무를 수 있는 구실이 없었다. 단계마다 봐야 했던 독일어 시험, 미대를 지원하기 위해 만들었던 수십 개의 포트폴리오, 수 백장의 그림들, 큰 포트폴리오 가방을 짊어지고 시험을 보러 이 도시 저 도시를 쏘다니던 나날들. 치열했지만 조급하고 불안한 하루들이었다. 일상에 불안이 짙어지면 사소한 속상함도 잘 씻기지 않는다. 마음엔 빛이 바래고 책장엔 먼지 내려앉을 틈 없이 지친 마음 전집으로 가득해져 갔다. 자려고 누웠을 때면 그런 책장 속에 둘러싸여 그런 나날들이 맴돈다. 그렇게 자주 속상했던 1년을 보냈다.

 

 시간이 흐르고 흘러 지친 마음 전집은 퇴색되었고 이제서야 다시 쓰인 그 시절의 나날들이 반짝이며 비친다.

어차피 이랬거나 저랬거나 내가 결정을 낼 수 없는 결과가 있고, 내가 할 수 있는 부분은 (기쁜 마음으로) 그저 해나가면 된다는 지당한 사실은 무단히 속상했던 시절을 보낸 후에야 알게 되었다. 


나는 이제서야 이런 작은 순간의 반짝이는 조각들을 반추하며 행복을 곱씹는다. 




아마 2015년, 집을 나서기 전 화실의 밤 @shinibu_


매일 아침에는 독일어학원, 오후에는 화실을 다녔던 삶. 늘 깜깜해지고 나서야 화실 밖을 나왔다.

마음이 자주 답답하고 학교에 얼른 합격해 자유로워지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했었는데.., 

실은 조급하고 지친 마음 때문이었다는 걸. 왜 모든 날들을 떠나보내야만 아름다웠음을 알게 될까?


https://www.instagram.com/shinibu_


그 날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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