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모든 걸 떠나보낸 후에야 아름다웠던 것을알게 될까?
2015년 3월 20일, 24살의 나는 독일에 왔다.
나는 이루어지든 안 이루어지든 촘촘히 계획 짜는 일을 즐겨하는데, 인생에 있어 큰 결정이라고 할 수 있는 유학을 별다른 구체적인 계획 없이 또한 꽤나 뜬금없이 그냥 갔다. 독일에 갈 수 있는 기회가 불현듯 생기자 마음 깊이 꼭꼭 눌러놓은, 그림을 그려야겠다는 열망과 지지부진한 현실의 권태가 엉겨 2-3주 정도 갈 채비를 하고 순식간에 떠나왔다. 지금 와서 드는 생각은 오히려 아무것도 알지 못했기에 단번에 떠날 수 있었던 것 같다.
공항에서 가족들과 인사를 하고 생애 첫 장기 비행에 허둥지둥 독일행 비행기에 몸을 실은 날, 그땐 전혀 몰랐지만 다시 돌아올 도착지가 불분명한 아주 긴 여행의 시작점에 나는 발을 내디뎠다.
독일에 오고 첫 1년은 꽤나 즐거웠던 것 같다. a, b, c부터 배우면서 알음알음 독일어로 얼굴이 붉어지는 수천번의 경험에도, 매일매일의 하루가 어학원과 화실의 반복이었어도 지금까지 전혀 다른 환경의 삶에 나는 설레어했다. 하지만 늘 그렇듯이 시간은 지나고 새로움은 익숙함으로 변했고, 가벼웠던 여행의 마음에서 살아내어야 할 삶이 보이자 그동안 감춰졌던 속상한 마음들이 하나 둘 기웃거렸다. 한국에서 받은 1년짜리 워킹홀리데이 비자는 설레었던 마음과 함께 끝이 나고, 나는 이방인으로써 때마다 이 곳에 있는 목적을 철저히 증명해야 했다. 어학 비자, 유학생 준비 비자 총 2년의 기간 안에 학생임을 입증하지 않으면 더 이상 머무를 수 있는 구실이 없었다. 단계마다 봐야 했던 독일어 시험, 미대를 지원하기 위해 만들었던 수십 개의 포트폴리오, 수 백장의 그림들, 큰 포트폴리오 가방을 짊어지고 시험을 보러 이 도시 저 도시를 쏘다니던 나날들. 치열했지만 조급하고 불안한 하루들이었다. 일상에 불안이 짙어지면 사소한 속상함도 잘 씻기지 않는다. 마음엔 빛이 바래고 책장엔 먼지 내려앉을 틈 없이 지친 마음 전집으로 가득해져 갔다. 자려고 누웠을 때면 그런 책장 속에 둘러싸여 그런 나날들이 맴돈다. 그렇게 자주 속상했던 1년을 보냈다.
시간이 흐르고 흘러 지친 마음 전집은 퇴색되었고 이제서야 다시 쓰인 그 시절의 나날들이 반짝이며 비친다.
어차피 이랬거나 저랬거나 내가 결정을 낼 수 없는 결과가 있고, 내가 할 수 있는 부분은 (기쁜 마음으로) 그저 해나가면 된다는 지당한 사실은 무단히 속상했던 시절을 보낸 후에야 알게 되었다.
나는 이제서야 이런 작은 순간의 반짝이는 조각들을 반추하며 행복을 곱씹는다.
매일 아침에는 독일어학원, 오후에는 화실을 다녔던 삶. 늘 깜깜해지고 나서야 화실 밖을 나왔다.
마음이 자주 답답하고 학교에 얼른 합격해 자유로워지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했었는데..,
실은 조급하고 지친 마음 때문이었다는 걸. 왜 모든 날들을 떠나보내야만 아름다웠음을 알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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