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허영과 본질 Aug 15. 2023

아픔을 사랑하기엔

‘적당히 아프게 맞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그러나 이미 상처가 나버린 후였다. 몸이 멍들고 피가 나고 상처투성이가 된 것이 아니었다. 나는 마음에 크고 짙은 멍이 들었다. 나를 좋아한다던 상대는 제대로 된 이유도 없이 나를 피했고, 결국은 문제의 해답도 듣지 못한 채 나는 관계를 포기해야 했다. 그것은 틀림없는 아픔이었다.


처음 보는 사람과의 대화에서 나에게 한심하다는 이야기를 했을 때도, 내가 시험을 망쳐 우울한 마음에 친구에게 성적 고민을 했지만 별 것도 아닌 일에 슬퍼하지 말라고 했을 때도 나는 아팠다. 그래도 나는 그 아픔들을 견딜만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런 아픔들을 견뎌내야만 내가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내 마음들에 쌓여있던 상처들을 마주하기 전까지는.


나는 손가락을 무는 습관이 있다. 손가락을 물면 섬세한 압력에 의해 조여 오는 묘한 아픔과 선명한 잇자국이 남는다. 무의식 속에 자리 잡은 습관이지만 나는 그것의 아픔을 좋아한다. 매번 비슷하게 압력을 주다가도 한 번씩은 조금 더 아프게 손가락을 물어본다. 그럼에도 나는 크게 놀라지 않고 의연하게 넘어간다. 나의 손가락을 물 때에는 내가 적당히 힘을 조절한다. 더 아프게 물어도 결코 참지 못하는 고통은 아니라는 것을 안다. 무의식의 나도 내가 다치는 것을 원하지는 않는 모양이다.


우리는 수많은 이유로 아픔을 느낀다. 당장 내 손가락을 물더라도 아픔을 느낄 수 있는 것처럼. 타인에게 아픔을 느낄 때에는 내 마음대로 고통의 압력을 정할 수 없다. 그래서 타인이 주는 고통은 나를 다치게 하기도 한다. 상대의 무의식이 만드는 아픔은 관계에 치명적인 상처를 남긴다. 상처를 주는 상대는 그것을 알아채기 어렵다. 내가 입는 상처에는 상대의 의도가 없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대의 의도가 담긴 상처도 있다. 그러한 상처들은 날카롭다. 마치 칼로 베이듯이 아프다. 나는 마음의 상처가 났음을 인지한다. 그리고는 곧장 마음에 단단한 벽을 세운다. 더 큰 상처를 막기 위해 그 관계를 단절하고 치료에 들어간다. 상대의 칼은 단단한 벽에 부서진다. 상대와 나는 더 이상 관계를 유지할 수 없기에 빠르게 관계를 마무리 짓는다. 이미 베여버린 마음이 쓰리고 아프지만 치료과정에 들어가고 더욱 부드러운 새살이 돋는다. 의도가 담긴 상처는 새살의 축복과 함께 점차 잊힌다.


상대방이 의도하지도 않은 것들은 갖추어진 형태도 없이 나를 공격한다. 그렇기에 내가 마음대로 형태를 바꿀 수 있다. 마치 내가 손가락을 물면서 힘을 적당히 조절하는 것처럼. 의도가 없는 상대는 내가 다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선명한 잇자국은 남더라도 상처가 나지는 않았으면 한다. 상대의 의도하지 않은 것들은 내가 다듬은 형태로 나에게 온다. 내가 그것을 날카롭게 받아들일 수도 있고 작은 상처 하나도 나지 않는 매끄러운 형태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나는 내가 다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고 애쓰며 그 형태를 둥글고 매끄럽게 다듬는다.


나는 아픔이 꼭 나쁜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아픔은 나를 성장시키기도 하니까 견딜 수 있는 만큼 견뎌내면 괜찮은 줄 알았다. 나를 싫어하고 의도적으로 나에게 상처를 주고 싶은 사람은 깔끔하고 빠르게 관계를 정리하고 치료하면 되고, 의도가 없는 상대방에게는 다칠 일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나의 마음은 이미 수많은 상처로 돋아난 새살 위에 새로운 상처가 다시 나 있었고 다듬고 다듬어도 결국 다 매끄러워지지 못한 의도 없는 공격들이 나를 아프게 하고 있었다. 새살의 축복과 함께 잊힐 것만 같았던 날카로운 상처들은 새살이 다 돋아나기까지 너무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아픔을 사랑하기엔, 아픔의 고통은 오랫동안 나를 괴롭히는 것이었다.


나는 다시 한번 손가락을 물어봤다. 묘한 아픔이 느껴진다. 내가 그 아픔을 좋아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아픔이라는 건 사실이다. 언젠가는 내가 손가락을 물다가도 상처를 입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픔은 꼭 날카로워야만 날 아프게 하는 것은 아니었다. 아픔은 상처를 쌓고 쌓아 치료를 어렵게 만들었다. 아픔을 사랑하기엔 아직 나는 쓰라린 상처가 너무나도 싫다.


이전 05화 그리워질 모든 순간들에게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