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앞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고 있는 빨간 떡볶이가 내가 먹어주기를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 그렇지만 나의 눈은 이미 반쯤 풀린 채로 머릿속 미궁을 파해치고 있었다. 풀리지 않는 미궁을 떠돌며 나는 나의 모든 욕구들마저 잃어버렸다. 생존에 필요한 식욕부터 수면욕까지도. 나는 배고픔이라는 감각을 잊은 채 떡볶이를 보고도 쉽사리 그것을 먹을 수 없었다. 나의 생각들은 이미 미궁이 지배하고 있었고 그 미궁의 출제자는 다름 아닌 ‘나’였다. 나는 미궁을 풀어감과 동시에 더욱 복잡하고 어려운 미궁을 만들고 있었다.
나는 내가 만든 두려움에게 처참히 패배했다. 두려움이 나를 이기고는 나를 앗아가고 있었다. 나는 무엇도 할 수 없는 바보가 되었다. 그렇게 며칠을 두려움과 무기력함 속에 살았다. 엄마는 이유도 모른 채 제대로 밥도 먹지 않는 나를 보며 답답한지 화를 내었고, 힘든 마음에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 그들은 높은 확률로 나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렇게 바보 같은 날들을 보내고 더 이상 굶고 싶지도 아프고 싶지도 않았던 나는 답답함에 화를 내었던 엄마와 나를 이해하기 힘들어하던 친구들 덕분인지 나의 두려움을 이기고 싶어졌다. 그래서 나는 내가 두려움에 갇히게 된 이유를 먼저 찾아보고자 했다.
내 두려움의 시작은 타인으로부터 받는 불안감이었다. 타인은 내 감정을 쉽게 짓밟을 수 있는 사람들이었고 타인의 존재는 비교라는 것을 하도록 만들었으며, 타인의 언어는 나를 바꾸거나 부정하거나 할 수 있는 힘을 가진 것이었다. 살면서 느꼈던 두려움 중에서 나의 기본적인 욕구를 잃게 만들었던 유일한 두려움이 타인에 대한 불안함이었다.
나는 소위 말하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 충만한 사람이었다. 나는 내가 하는 무엇이든 해낼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나를 단 한 번도 부정한 적이 없었다. 그렇기에 나는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을 쉽게 시작할 수 있었다. 그랬던 나에게 타인들은 나를 부정할 수도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나의 모든 것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않았다. 물론 나를 응원하고 지지하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넓고 넓은 세상 모두가 나를 응원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그렇게 나에게는 없던 부정을 받았던 나는 처음 보는 두려움에 빠져버렸다.
평소 좋아하던 떡볶이를 눈앞에 둔 채 식욕이 없어 모락모락 올라오는 김을 바라보고만 있던 날, 나는 타인이 짓밟았던 내 감정에 의해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 사람은 감정을 이용해서 나를 착각하게 만들었고 이내 온갖 핑계를 대며 나에게 생겼던 감정들을 부정했다. 그 핑계들을 쉽게 이해하지 못했던 나는 그 핑계를 진짜 나의 잘못으로 여겼다. 이렇게 생겨난 나에 대한 의심은 나를 더욱 어렵고 복잡한 미궁 속에 빠지게 했다. 꼬리에 꼬리를 물어 나를 더욱 의심하고 부정하기를 반복했다.
미궁 속을 헤매고 있을 때 나는 항상 나 자신을 응원하던 나와는 정반대인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마치 지금의 모습은 나에 대한 믿음이 부족해 보였다. 그리고 그 믿음의 부족이 나의 깊은 두려움을 만드는 이유였다. 타인에게 받은 한 번의 부정은 나에 대한 믿음들을 의심으로 바꿔가며 자신감을 부수기 시작했고 나는 끝도 없이 추락하며 생각했다. 추락의 끝에 푹신하고 탄력이 좋은 무언가가 있다고 믿는다면 나는 다치지 않을 수 있다고.
끝없는 미궁에서 탈출할 수 있는 해답은 바로 믿음이었다. 나에 대한 믿음은 더 이상의 미궁을 만들어 내지 않았다. 우리는 끊임없이 타인에 의해서 부정당할 위기에 놓여있다. 나는 그럴 때마다 더욱 자신에 대한 믿음을 가지려고 노력한다. 이제는 나에 대한 믿음이 부족할 때 타인이 만든 두려움 앞에 바보가 된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