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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방. 조용하고 차분한 방.
문 앞엔 문장 하나가 적혀있다.
당신의 이름: 무얼 소망하세요?
사방이 텍스트로 둘러싸인 방.
텍스트란 무엇인가? 읽히는 모든 것.
정확하게 보려면 철저하게 공부하세요.
통제할 수 없는 건 기록하세요.
다음을 위해 쌓아보세요.
길게 이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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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는 한 시간째 K의 말을 듣고 있다. 말을 끊거나 의견을 얹지 않고 듣고만 있다.
그냥 좋아하는 걸 하세요. 해야 하거나 하고 싶은 거 말고요. 의무나 욕망 말고 자연스러운 걸 하세요. 억지로 만들지 마세요. 되는 대로 살아보세요. 주어진 운명을 확인하고 다듬어 간다는 느낌으로요. 이젠 그래도 돼요. 그동안 이것저것 해봤지만 너무 성과가 없었죠?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게 성과라면 성과겠죠. 그래도 여전히 나눌 게 있을 거예요. 깊이 공부하고 알아가야 할 게 있을 거예요. 지식을 쌓읍시다. 이젠 그게 지혜예요. 어떤 지식도 편견을 갖지 않고 두루 아는 거요. 행복도 고만고만, 불행도 고만고만... 어쩌면 행복은 상상력에 달린 건지도 모르겠어요. 스스로 문을 닫아버리지만 않는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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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지널 텍스트를 찬양하게 되는 것. 여기서 텍스트란 읽힐 수 있는 모든 것. 책, 그림, 사진, 패션, 사람에 이르기까지. 읽는 사람이 끊임없이 자신을 투영하게 하고, 오래된 것으로부터 새롭게 해석할 거리를 던져주는 클래식의 힘. 그러니까, 모든 새로운 것fresh new들의 모태이면서 읽는 사람 수만큼의 새로움classic new을 갖는.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결국 가장 가깝고도 먼 자신에게로 돌아올 운명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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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 동안 K의 말을 듣고 있던 Y는 말했다.
아이슬란드 스티키스홀뮈르에는 '물 도서관'이라는 설치 작품이 있어요. 예전에 도서관이었다는 이유만으로 이름이 그렇게 지어졌고 실제로 도서관이랑은 별 상관없지만요. 24개의 물기둥이 세워져 있는데 그 물은 각기 다른 색과 질을 가진답니다. 오팔 빛을 띤다거나 노란 유황 빛이 돌거나 하는 식으로요. 작가 로니 혼은 '날씨를 말하는 건 자기 자신을 말하는 거예요.'라고 했어요. '물 도서관' 바닥에는 기후 조건이나 바다, 혹은 대기 상태를 나타내는 용어가 영어나 아이슬란드어로 쓰여 있었어요. 로니 혼은 날씨와 인간의 공통점을 변덕스러움에서 찾아요. 빛, 구름, 습도, 공기, 바람 이 모든 것이 계속 변화하듯이 인간도 계속 변한다는 거죠.
그리곤 덧붙였다. '개별적이고 안정적이며 그래서 이름을 붙일 수 있는 실체'라고 믿는 것조차 매 순간 변화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