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4시 반, 빈틈없는 업무처리로 결재 상신까지 마치고 뜻 모를 뿌듯함에 심취한 A. 자리를 뜨려던 그때, 학생들이 몰려온다. 어이없는 실수를 했음을 깨닫는다. 그냥 넘겨도 좋을 사소한 실수이지만, 심지어 다음 날 수정하면 되는 작은 실수임에도 강박적 자괴감에 시달리는 A. 이런 좌절은 왠지 조금 과한 느낌이다. 저녁을 먹고 책상 위 스피커 옆에 두었던 타로 카드를 꺼내 자점을 친다. 펜타클 에이스, 완드 6, 소드 5. 흠, 잔뜩 성취하고도 눈물을 흘리는 하루다.
A는 자신의 강박적 불안, 아이 둘을 키우는 지인의 불안, 스레드에서 본 모르는 사람의 불안을 연속적으로 발견하면서 불안에 대해 써야겠다고 다짐한다.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잊은 사람들을 위해서, 아니 잘 살아내고 싶은 자신을 위해서.
열린 것처럼 보이지만 열린 건 아니에요.
On dirait que c'est ouvert mais c'est pas ouvert.
세계어를 배우기 시작한 건 세계사가 사람 사는 이야기로 들리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피곤한 정치사가 아니라 욕망, 단절, 고통, 갈등의 드라마. 철저하게 자신의 이익을 위해 돌아가는 세상을 지켜보며 A는 한 발짝 물러나 지켜보는 세상이 흥미롭다고 느낀다. 세상 공부. 삶은 친절을 기브 앤 테이크로 나눠 가지지 않고, 도움을 준다는 명분 뒤엔 반드시 제 이익을 챙기는 야무진 계획이 있으며, 세계가 성자와 돼지로 구성되어 있으나 그 비율은 절대 5:5가 아니라는 점.
영국과 미국의 말을 배우고, 중국의 말도 배웠다. 프랑스의 말과 독일의 말도 배우기 시작했다. 외국의 말이 아니라 세계의 말이었다. 숙달하고 통달하려는 계획은 없었다. 서로 비교하면서 얼마나 같고 얼마나 다른지 보려는 심산이었다. 열린 것처럼 보이지만 열리지 않은 가게 문처럼 A의 마음속에는 아직 미적지근한 뭔가가 끈적거렸다.
소설에서는 다수의 캐릭터가 각자의 역할을 연기하는데, 작가를 대변하는 캐릭터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캐릭터도 있다. 이들 모두에게 발언권을 부여함으로써 작가는 소정의 역학을 얻게 된다. 논픽션에서 작가는 '대리를 앞세우지 않은' 자아만 가지고 작업해야 한다. 그래서 필요한 역학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자기 안의 '타자'를 추구하고 또 찾아내야 한다. 불가피하게, 글을 구축하기 위해 서술자는 고백이 아닌 자기 탐문, 아니 자기 연루의 형태로만 간여해야 한다. <끝나지 않은 일>, 160
언젠가부터 에세이보단 시나 소설을 쓰고 싶었다. 화려하게 데뷔하는 작가가 되고 싶은 것도, 어떤 장르든 척척 써내는 다작의 신이 되고 싶은 것도 아니었다. 다만, 자연스럽게 쓰고 싶었다. 써지는 대로. 삶이 왜 여기에 있는지. 다른 곳에 있지 않고 왜 여기인지. 다른 곳에 있지 않고 왜 (아직) 여기인지. 괜한 심통을 에세이에 대고 부렸다. 자기 안의 '타자'를 추구하는 일은 구태여 과거의 자신을 긁어내는 작업이었는데 몇 개월간은 눈물 나게 시원하고 개운했지만 어느 순간 에너지가 바닥이 났고 판도라의 상자를 열면서 좌절감도 함께 빠져나온 게 아닐까 싶었다. 글에 자신을 지나치게 개입시키면서 A는 글의 대한 결과물에 지나치게 민감한 사람이 되어버렸다.
업무가 과도했던 작년 여름 놓아버린 크로매틱 하모니카를 꺼내고는 엘라 피츠제럴드 Ella Fitzgerald의 미스티 Misty를 (처음 시작했을 때와는 달리) 다소 우울하고 안개 낀 느낌이 든다는 이유로 문 리버 Moon River로 바꿔 연습하기로 한다. 12월에 가족 연주 모임인 삑사리 클럽에서 연주하기로 하고. 프랑스어의 r발음을 하며 입 안에서 새로운 공기가 터져 나왔다. 10월부터 시작될 독일어 수업도 기대가 됐지만 여전히 소설이 되지도 에세이가 되지도 못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시간이 흐르면서 관계에 대해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게 된 한 가지는, 영원하지 않다는 것이다. 자기 자신과의 관계마저 그러했다. 언제나 잡히지 않는 슬픔과 허무를 맞이하게 된다. 타인을 만나고 이따금씩 자기 자신과도 마주친다.
인간적 연결의 유대는 유약하다는 걸, 그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시간, 상황, 변덕스러운 공감 능력의 수수께끼에 쉽게 좌우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전에는 연결이 정상성의 규준이라는 명제를 단 한 번도 회의하지 않았다. 꾸준하고 항상적인 애착관계가 없는 외톨이가 된다는 건, 비정상성이라는 끔찍이도 두려운 혐의에 자기를 드러내놓고 노출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번개같이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외로움은 규준이고, 연결은 이상이라는 것. 연결은 인간 조건의 규범이 아닌 예외였다. <끝나지 않은 일>,143-144
외로움은 디폴트값이며 연결은 이상이라는 비비언 고닉의 말에 A는 고개를 끄덕인다. 자신이 끊임없이 글 속으로 끌어들인 타인들 덕에 삶이 역동적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읽고 쓰고 세계어를 배우고 다시 읽기 시작하다 깨닫는다. 마음이 지쳐버렸을 땐 놓아버리는 게 아니라 새롭게 공부를 시작해야 할 때라는 걸. 직업을 바꾸고 싶었고, 이전의 공부가 모두 헛짓이라고 느낄 때도 있었다. 버전이 바뀔 뿐이다. 지금 여기에 있으면서 해낼 수 있는 일들을 찾아온 것이다. 다음 단계로 가기 위한 새로운 공부를 시작했으니 어쩌면 명랑한 다음이 시작되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