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뭉클 Sep 15. 2024

관계, 인간 1

초초초단편소설




그 친구의 이름이 연지였는지 윤지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쩌면 지윤이나 지연일지도 모른다. 이따금씩 꿈에 나와서 내게 사과를 하기도 하고 내가 사과를 하기도 했지만 정작 무슨 내용으로 사과를 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연지는 야간 자율학습 시간에 가장 마지막까지 남아 같이 공부했던 친구였고, 윤지는 크로아티아였나 필라델피아였나 아무튼 낯선 타국의 도시들을 읊어대며 모험가 코스프레를 하던 친구였고, 지윤이는 매 시간마다 책상에 엎드려 있지만 전국연합학력평가에서 전교 1등을 놓친 적 없던 친구였고, 지연이는 연지의 친구였지만 나중에 나랑 더 친해진 케이스였다.


아니다, 거짓말이다. 모두 거짓인 것은 아니지만 일부는 사실이 아니다. 그들에 대한 나의 기억이 거짓이라기보다는 그들이 내 친구였는지에 대해 때때로 의문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_



열역학 제2법칙은 시스템 전체의 엔트로피가 항상 증가하는 방향으로 일어난다는 거야. 그러니까 우주 전체의 엔트로피가 감소하는 현상은 일어날 수 없다는 거지. 엔트로피는 보존되지 않고 시간에 따라 계속 증가해.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방향은 혼란과 불균형의 상태야.


그럼 정리를 하면 될 거 아냐.


정리한다고 치자. 그럼 무질서 정도가 낮아지겠지. 근데 정리한다는 행위로 에너지가 증가해서 결국 엔트로피는 다시 증가해. 모든 것들이 흝어지고 에너지를 발산하려고 하는데 열역학 제1법칙 기억하지? '에너지는 창조되거나 소멸되지 않는다.' 모든 에너지는 유용에서 무용으로, 질서정연에서 무질서로 변하는데 시간이 지난다고 해도 다시 이전으로 돌아가는 일은 없다는 거야. 일방향이지.


어질러진 교실, 흐트러진 사이, 일 년을 주기로 무용해진 관계.


그래 그런 거. 하지만, 시간과 노력을 들이지 않으면 다시 예전의 상태로 돌아가지 못하는.



_



살아간다는 건 엔트로피를 관리하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가끔 인간이 우주를 떠다니는 튜브 같다고 생각했을 때가 있다고 했을 때 친구들은 내게 너무 건조한 인간이라고 했다. 인풋과 아웃풋으로 만들어진 존재. 그게 뭐 어때서.  


언젠가 후배가 내게 고민을 토로했다. 아이가 교우관계가 힘들어서 전과를 하려고 한다고 했다. 친구와 좀 다퉜다고 과를 옮기고 진로까지 다시 생각하겠다니. 우리는 이미 삶이 견고해져서 잊었을지도 몰라요. 아이한텐 친구의 한마디가 우주 전체를 흔드는 말일 거예요. 대의 시간이 우리의 시간보다 느린 것처럼, 시절 친구의 말이 지금 누군가의 말보다 배는 무거울 거예요.



우린 친구였을까. 그들은 친구일까. 학급에 우연히 모인 지인 정도 아니었을까. 그 애가 그 사실을 알았다면 시간이 좀 다르게 흘렀을까. 말 한마디 한 마디를 가볍게 넘겨버리고 짓눌려버리는 일 따위는 없었을까. 텍스트를 이해하려면 텍스트 밖으로 나가야 하는 것처럼, 아이의 시간을 이해하려면 아이가 아니어야 하는 모순에 대해 생각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뭉클_어게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