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사랑하고 싫어하고 미워하고 울컥하는 지점이 세세하게 다르고 전반적으로 일치한다는 점에서, 이 이상한 세계에 대해 추악한 밑바닥부터 찬란한 희망까지 골고루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어떻게? 이기적이고 불안하고 수다스러운 내가?
뭉클북클럽을 통해 아이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고' 자신만의 질문을 하나쯤 품게 하고 싶다는 나의 바람은 이야기에 대한 호기심으로 이어졌다. 이야기의 목적, 이야기를 잘하는 방법, 이야기의 힘, 성장과 치유를 위한 이야기, 나를 극복하는 이야기 등등
하지만, 이야기에 '대해' 이야기하기보다는 이야기'를' 쓰고 싶다. 평론가나 심사위원 말고 까이는 이야기를 쓰는 사람. 이 시점에서 내게 영감을 주는 썰이 있다.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친구들과 식당에 갔다. 그는 자신의 뛰어난 글솜씨로 소설의 모든 효과를 단 여섯 어절로 압축할 수 있다고 장담했다. 친구들은 비웃으며 그가 실패하는 쪽에 10달러씩 걸었다. 헤밍웨이는 냅킨에 여섯 어절을 휘갈겨 탁자 주위로 돌렸다. 친구들은 잠시 냅킨을 바라보며 눈을 끔벅거리다가 얼굴을 찌푸리며 옆 사람에게 넘겼다. 그러고 나서 다들 지갑을 뒤져 헤밍웨이에게 10달러를 건넸다. 그가 냅킨에 쓴 문장은 아래와 같다.
'팝니다: 한 번도 안 신은 꼬까신'
<이야기를 횡단하는 호모 픽투스의 모험>
의미의 소유권을 양도하는 일. 상대에게 의미를 넘긴다. 번역을 하면서 배운 점 중 하나는 번역가가 글을 모두 씹어 소화시켜 독자에게 넘기면 독자는 문장을 씹고 맛볼 기회를 빼앗긴다는 것. 문학엔 직유, 은유, 반어 등 돌려 말하는 비유들이 풍부하고 압축하고 함축해서 말할 수록 깊은 여운을 남긴다. 물론 쓰는 글이 팩트 100%에 기반한 글이 아닐 경우에 말이다. 내가 너무 많이 웃고, 울어버린 문장은 읽는 사람에게 도달하지 못한다.
듣고 싶은 이야기: 문제를 극복하는 이야기
그래서 내가 듣고 싶은 이야기는 문제를 극복하는 이야기다. 싫고 어렵고 이상한 사람들이, 짠하고 그저 각자 열심히 사는 사람으로 변모하는 이야기, 어떻게든 살아남은 이야기에 대해.
<이야기를 횡단하는 호모 픽투스의 모험>
진짜, 듣고 싶은 이야기: 행복은 지루하고 따분해? 오늘 당장 필요한 이야기
우리는 행복한 이야기를 듣고 싶은 게 아니라, 행복해진 이야기를 듣고 싶어하는지도 모른다. 세상은 사람이 아니라 문제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내가 문제를 가진 게 아니라, 문제가 나를 가졌다. 세상엔 이야기도 산다. 사람이 살아온 시간만큼 이야기가 살았다. 사람이 죽어도 이야기는 남을테니. 사람보다 오래 산다.
수렵채집의 시절부터 우리는 '지금, 당장 필요해서 좋은' 이야기에 길들여져 왔다. 합리적이며 윤리적인 이야기보다는 오늘을 살아갈 이야기를 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