넛지에 유능한 자
얼마 전 아이들이 독서를 싫어하거나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초단편소설을 읽힌다는 글을 본 적이 있다. 그럴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내게 오히려 반대의 경우도 있다. 아이들에게 쉽게 다가가려고 10대 시리즈, 쉽고 얇은 책을 권하니 정작 진짜 책을 읽으려는 아이들은 "선생님, 차라리 코스모스 같은 책을 3년 동안 읽고 싶어요."라고 말했다. 물론 그 아이는 <랩걸>,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등을 읽는 아이였으니, 10대를 대표한다고 보긴 어렵지만. 어쨌든 결론은 사람이 그렇듯 10대도 아주 다양하다는 것.
일대일 상담을 기반으로 책을 권하는 일은 이상적이고, 난감하며, 시간과 에너지의 효율이 떨어지는 일임에 분명하다. 근데 원래 교육이 효율 따지면서 하는 일은 아니다. 아마 효율을 바란다면 그것은 입시에 가까울 것이다. 둘은 접점이 많지만, 동의어는 아니다. 현실과 이상 사이를 끊임없이 오가는 건 멀미가 나는 일이지만, 나는 이 비행을 멈출 수가 없다. 한 번씩 내 삶에 등장해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와 '침묵의 봄'을 고르게 하는 아이들을 만나는 즐거움, 수행평가를 위한 것이라도 소설을 원하는 장르에 맞게 권해주는 기쁨을 대체할 수 있는 건 없다. 아직까진 그렇다.
소설<Hatchet> 수업을 할 때, 본문을 2-3번 정도 읽고 밑줄과 인덱스를 두어번 더 다듬고 텍스트의 가이드를 제공하는 방식으로 준비도를 높였다.
하지만 올해의 북큐레이션과 원서수업을 돌아볼 때, 아이들에게 책 추천에 앞서, 혹은 그와 함께 필요한 것은 밑줄이나 인덱스가 붙은 '친절한' 가이드가 아니라 '낯선' 질문이다. 아주 친숙한 나를 낯설게 하기. 모르는 나를 만나게 하기. '아, 어?나 모르네.' 깨닫게 하기. 나는 질문만 준다. 답을 말하고 싶은 걸 온몸을 비틀며 참는다. 다음 단계로 내가 넘어가지 않고 그들이 넘기는 모습을 침착하게 바라본다. 버틴다.
'알아서 하도록' 쿡쿡 찌르는 넛지를 잘하는 사람(nudger)이 되는 것. 2024년의 새로운 목표다. 오늘은 몇 번의 넛지를 했고, 어떤 방식으로 넛지를 했는가, 더 나은 넛지를 고민하기.
머리 없는 세계, 세계 없는 머리
질문이 없는 삶은 하나도 설레지 않구나. 수시로 실망, 현타, 무의미가 문을 두드린다. '굳이'의 늪에 빠지면 헤어나오기 어려우니 주의해야한다. 역시나 질문을 잘해야 인생이 풀린다. 그걸 깨달아야 독서를 한다. 질문이 먼저다. 책을 읽어서 문제가 해결 되냐는 질문을 받으면 나는 그냥 이렇게 대답한다. 책은 읽으려고 하는 순간, 첫 장을 여는 순간 그 목적을 거의 달성한다고. 내가 느끼기에, 책을 좋아하거나 읽으려고 시도하는 사람은 대체로 열정적, 긍정적이거나 간절함을 지닌다. '원하는 것'이 있어 문을 두드렸고, 그걸 얻고자 노력할 '마음'을 먹었으니 책이 원하는 걸 주지 않을 도리가 없다.
10대를 꼭 집어 말하지 않더라도, 대부분의 일은 의지만으로 충분치 않다. 성실한 사람들도 의미를 끝끝내 찾지 못하면 다시 방황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얼마 전 아이들에게 카톡 메시지를 보내면서 '좋아하는 일, 잘하는 일'은 개선되고 계발되는 것이지, 어딘가에 툭 놓여있어 갖다 쓰는 게 아니라고 적었다. 나의 영원한 독자인 아이들에게 통찰을 나누고, 잘못 자란다 싶으면 잡초를 뽑아주고 가지치기도 해주고 무작정 아웃풋(output)을 이끌어 내기보단 인풋(input)도 많이 줘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질문을 던지는 게 인풋의 연장선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건 아웃풋을 유도해서 인풋의 필요성을 깨닫게 하는 것이지 엄밀히 말하면 인풋은 아니었다.
인풋와 아웃풋의 균형감각은 중요하다. 조언이나 잔소리보다는 마인드셋에 관한 인풋, 아웃풋을 끌어낼 환경이 얼마나 중요한지. 갈길이 멀지만, 내가 살아내는 딱 그만큼만 알려줄 수 있을테니 다시 또 힘을 낸다. 머리 있는 세계, 세계 있는 머리를 만나는 날을 고대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