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꿈이 죽었을 때
10대의 거친 생각과 불안한 눈빛 그걸 지켜보는 나
<죽음과 임종에 관하여>를 쓴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는 불치병에 걸려 가망 없는 상태로 죽어가면서 겪게 되는 마음의 변화에 5단계가 있다고 설명한다.
1단계 부정. 극심한 상실의 고통을 최소화하기 위해 현실을 부정한다. 착각을 한다기보다는 현실을 받아들이기 위한 첫 과정.
2단계 분노. '책임'이 있는 사람이나 상황에 대해 분노를 느낀다. 다른 사람들의 위로나 어설픈 연대도 거부한다.
3단계 타협. 현실을 조금씩 받아들이는 단계. 통제감을 되찾으려는 시도를 하기도 한다. 타협점을 찾는다.
4단계 우울. 이제야 제대로 느끼는 상실감. 혼자 있는 시간이 늘어나고 감정 표현이 줄어들며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불면 혹은 식욕 저하 등을 겪는다.
5단계 수용. 슬픔, 후회, 고통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적절히 사회 생활도 하고 삶의 의미도 어느 정도 찾아가는 단계.
살아 있으면서도 '다른' 삶을 원하면 죽음과 애도의 5단계를 겪게 된다. 10대, 태어나 처음 꾼 꿈들이 하나씩 사라질 때, 꿈이 강렬할 수록 꿈은 곧 내가 된다. 아주 위험한 동일시. 내가 사라지는 꿈. 그것은 자의식이 사라지는 꿈과는 다르다. 자의식은 사라질수록 좋지만, 정체성이 흔들리면 곤란하니까. 어른이 된다고 어른이 되는 건 아니다. 아이는 아직 마음 속에 남아있다. 몸이 자란다. 시간이 흐르면서 몸과 마음의 성장 차로 생긴 갭이 채워지려면 스스로 많은 노력을 해야한다.
1단계 부정. 내가 꿈꾸던 미래가 고작 이것 뿐일 리가 없어. 다른 친구들은 다 원하는 대학에 가고, 하고 싶은 게 분명하잖아? 나만 꿈도 없고 하고 싶은 것도 없고. 그렇다고 딱히 하기 싫은 것도 없고. 그래, 설마. 이게 다는 아니겠지.
2단계 분노. 우리 부모님은 왜 이렇게 나를 멍청하게 낳은 거야? 난 왜 쟤네들이 싫은 소리를 해도 찍 소리 한 번 못하는 거야? 쟤는 왜 자꾸 나랑 친하게 지내고 싶어하지? 이제 서로 안 맞는 거 충분히 알지 않나?
(이 단계는 개인차가 상당하다. 거의 0에 수렴하기도 하고, 5단계까지 갔다가 수시로 찾아오기도 한다.)
3단계 타협. 아, 뭐 먹고 살지? 공부를 해도 너무 안 했나? 아니, 공부를 그렇게 해도 왜 성적이 안 나오지? 그렇게 노력했는데 안 되는 걸 어떡해. 재능도, 운도 따라줘야 하는 거지. 누구 탓해봐야 뭐해. 결국 내 인생인걸.
4단계 우울. 근데, 진짜 허무하다. 혼자 있는데 더 혼자 있고 싶다. 아무것도 하기 싫다. 어제는 눈물도 났는데 오늘은 눈물도 말랐다. 나는 왜 사는 걸까? 삶의 의미를 찾고 싶다.
5단계 수용. 요즘은 엄마랑 옛날 얘기하듯 얼굴 붉히지 않고도 수다를 떤다. 여전히 씁쓸한 부분도 있지만 어쩌겠나. 삶은 계속된다. 힘들 때 날 도와줬던 친구들 잊지 말아야지. 첫번째 꿈이 죽으면 두번째 꿈이 태어나는 법.
아이들과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어린 날의 내가 스쳐갔다. 그 거친 생각과 불안한 눈빛을 지켜보는 나의 마음은 이상했다. 그 때의 나는 전혀 그립지 않지만, 티슈가 부족할 정도로 구슬같은 눈물을 흘리다가도 해맑게 웃는 모습을 보면 웃음이 났다. 몇년 전만해도 그 아이들을 보면서 다시 살아보고 싶은 생각에 질투를 느꼈을지도 모르지만 이젠 달랐다. 돌아간다고 다시 살아지는 게 아니었다. 정말로 다시 사는 건, 그 때의 나와 화해하는 것. 아이들을 보면서 마음이 맑아졌고, 어린 날 아무도 나에게 알려주지 않았던 마음들을 알려주고 싶었다.
다만 그 방식과 적절한 때를 기다린다.
툭툭,
마음의 먼지를 털어내는 일. 찰나같은 인생에 뭘 그렇게 많이 쌓고 또 한참을 덜어내는지.
툭툭,
그냥 그걸로 충분했으면 좋겠다. 아주 가볍고 싱그러운 삶의 앞자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