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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산홍 Dec 16. 2022

내 정원의 꽃 핀 자리

  녹색 대문의 빗장을 열고 들어서면 낯익은 고요가 기다리고 있는 곳, 이곳은 내가 가꾸고 있는 작은 세상이다. 시각은 벌써 정오에 가까워져서 거리를 들썩이게 했던 아침나절의 북적거림이 사라진 사위가 조용하다. 한동안 비워두었던 정원에서 꽃들이 무탈하게 살고 있었는지, 꽃삽을 찾아들고 정원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바빠진다. 

  내 정원의 봄은 일제히 솟아오르는 새싹들과 함께 시작된다. 엄동설한을 뚫고 꽃과 잎을 밀어 올리는 식물들과의 만남은 매번 눈부시다. 지난봄, 낙화하는 꽃들과의 아쉬운 이별 후, 이듬해 봄에 다시 찾아온 꽃들과 만날 때면 항상 마음이 설렌다. 지그시 눈 감고 봄꽃 향기를 맡고 있으면, 가슴에 따사로운 기운이 가득 들어와서, 행복한 하루를 지낼 수 있는 에너지가 되어준다. 

  여름의 정원에서는 무수한 잎들을 단 위풍당당한 나무들을 만난다. 그 짙푸른 잎사귀 아래에서 사는 작은 식물들의 기세까지도 당당하다. 위를 향해 자랑스레 뻗어 오르는 것이 키울 꽃인지 뽑을 풀인지도 가늠할 수가 없다. 귀하고 흔하고 예쁘고 볼품없고를 벗어난, 무성한 생명들의 전성기를 바라보는 즐거움이 있다.

  여름밤에 만나는 치자 꽃향기에는 냉정과 열정의 불협화음으로 헤어졌던 마음들이 오롯이 담겨 있다. 그리운 마음들과의 조우를 위해서 봄마다 정성스레 심어놓는 치자나무는 해마다 꽃과 함께 시들어버린다. 젊은 날의 냉정과 열정이 내 곁에 영원히 머물지 못한 것처럼, 늘 반짝 피고 사라져 버려 항상 애잔함을 남긴다. 

  가을의 정원에서는 형형색색의 국화꽃이 농염한 자태와 향기를 자랑한다. 더 이상 버릴 것 없는 가벼운 몸매로 서 있는 나무들과 지금은 떠나버린 꽃들의 빈자리를 채워주는 꽃이다. 차가운 바람 앞에서 품을 것보다는 버릴 것이 더 많아진, 상실의 계절에 찾아온 꽃이기에 더욱 귀하게 만나는 꽃이다. 

  꽃들이 가득했던 날들이 너무도 그리운 겨울에는, 붉은 열매를 가득 달고 있는 남천이 정원을 지킨다. 하얀 눈에 덮인 새빨간 열매는 꽃보다 더 아름답다. 겨울 끝자리를 꾸며줄 설중매와 동백이 찾아오기 전, 붉디붉은 정열로 차가움을 녹이고 있는 남천이 있어서 겨울정원이 따사롭다.

  엄정한 자연의 순리에 따라 꽃이 피는 정원에 가끔은 때 아닌 꽃이 피어나서 뜻밖의 기쁨을 안겨줄 때도 있다. 올해도 장마 끝에 앵두꽃과 철쭉꽃이 피어났다. 봄날에 헤어졌던 연분홍빛을 여름의 끝자락에서 다시 만나는 기쁨이 유별났다. 잦은 빗줄기 때문에 무성한 잎뿐이던 정원에, 때 아닌 꽃이 피어서, 들여다보는 즐거움에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하루 중, 정원에서 보내는 시간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때이다. 해마다 피워 올리는 꽃이 늘 처음의 꽃과 같은 경이로움에 반해서 살피다 보면, 정원에서 나올 시간을 훌쩍 넘기게 된다. 

  번잡한 일상이 시작되기 전, 내 정원의 꽃 핀 자리를 거니는 시간은 하루를 무사히 지낼 수 있는 기운을 채워준다. 꽃과 나무들이 정갈하게 자라고 있는 내 정원의 꽃 핀 자리가 있어서, 내 삶이 평안하게 흘러갈 수 있음을 항상 감사한다. 

  오랜만에 찾은 정원에서 꽃과 나무들을 살피다 보니 어느새 해가 뉘엿뉘엿 지는 해거름이다. 이곳저곳에서 국화꽃이 피어나는 걸 보니, 머지않아 내 정원의 꽃 핀 자리에는 국화꽃 향기가 가득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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