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는 생활
밥솥은 비어 있었다. '집에 밥이 없으면 없다고 말을 해주지.' 남편은 화가 묻지 않은 말투로 원망인 게 뻔한 용도의 말을 던졌다. 화가 난다. 이제는 외출 후 부랴부랴 돌아온 나의 얼굴을 보면 밥부터 생각나는구나. 아이들은 무언가 차려서 먹고 있었고 어떻게 밥이 조금 있었다. 냄비에 눌어붙은 밥풀들의 잔해가 보였다. 냄비밥을 해주었구나. 알아서 해결했으면서 굳이 나에게 그럴게 뭐람.
남편의 밥을 해결해 주어야 하는 마지막 임무를 안고 슈퍼에 갔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물건도 많고 세일도 많이 하는 마트로는 가지 않는다. 급한 걸음으로 나는 아파트 후문을 나가 몇 걸음만에 도착할 수 있는 구멍가게로 간다. 오늘도 국이 없다면 계란국을 남편은 스스로 끓일 것이고 그것이 시위로 보일 것 같은 나의 성미는 얼른 국거리를 찾기에 바빴다.
시들시들하지만 빼곡하게 포장되어 있는 얼갈이배추가 눈에 띈다. 언젠가 낮시간이 자유로운 전업주부 찬스로 극장에서 조조로 보았던 영화가 생각났다. 배추 된장국으로 시작되어 곶감으로 끝난 영화.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갈 때 나와 옆자리의 낯 모르는 남자의 뱃속에서는 동시에 꼬르륵 소리가 났더랬다. 영화를 본 후에 먹고사는 생활이 지겨워질 때면 그때의 장면들을 떠올려보며 메뉴를 결정하고 요리를 했었지. 극장에서 돌아온 날 저녁에는 배추 된장국을 끓여 먹었던 기억이 난다.
집에 돌아와 얼갈이배추로 국을 끓였다. 새로 밥솥에 밥을 안치고 급하게 사온 고기를 볶았다. 냄비에 눌은밥은 아까워 뜨거운 물을 붓고 끓였다. 끓인 밥. 아프거나 입맛이 없을 때마다 엄마가 해주던 밥이다. 남편은 미리 끓여놓은 밥은 불어서 맛이 없다 했고 나는 괜찮다고 하다가 또 한 번 화가 났다. 내가 먹을 거니 상관 말라고 성난 소리를 했다.
끓여놓은 밥을 두 번에 나누어 먹었다. 불어있지만 구수하고 속이 편해지는 느낌. 화가 풀어지는 것인지 끓인 밥에는 치유의 힘이 있는 것인지. 나는 잠시 어릴 적의 집에 돌아가 남아있는 식재료를 박박 긁어 소박하지만 꽉 찬 한 끼를 먹는 기분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