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생활
서점에 볼일이 있어 갔다가 에세이 코너에 잠시 멈춰 섰다. 신간들 위로 나온 지 좀 된 듯 보이는 책이 보인다. 딸기색 립스틱을 바른 에이코 할머니. 백발의 할머니가 정말 빨간 입술을 하고 웃고 있다. 나는 한 번도 발라보지 못한 극강의 새빨간 색. 입술이 경계가 선명해지는 강렬함이 흰머리와 잘 어울린다.
저자는 가도노 에이코. '마녀 배달부 키키'를 만든 분이다. 키키와 함께 다니는 검은 고양이가 어릴 적 항상 안고 다니던 인형과 닮았다. 지금 키우고 있는 고양이도 그때의 기억을 못 잊어 입양한 까만색 고양이다. 귀여운 소녀와 검은 고양이가 귀여워 애니메이션을 찾아본 적이 있었다. 키키도 사진 속 할머니의 입술색처럼 빨간색 커다란 리본을 머리에 하고 있다. 어딘지 모르게 닮아있는 느낌이다.
올해 84세 할머니는 백발의 똑 단발을 하고 빨간 안경테에 크리스천 디올의 12,13,14번 립스틱을 좋아한다. 작업복과 일상복을 구분하고 자신만의 스타일로 옷을 입는다. 정해진 패턴 안에서 생활하며 간단하고 영양가 있는 한 그릇 음식을 추구한다. 늙으면 일찍 잠들고 아침에 더 자고 싶어도 눈이 떠진다고 하지만 할머니의 수면시간은 새벽 2시부터. 밤 시간을 즐길 줄 알고 자기 전 매일 미스터리물을 읽는다.
대충 넘겨본 책 속에는 37세의 나보다도 젊은 할머니가 살고 있다. 나도 나만의 방과 책이 꽉 채워진 책장을 갖고 싶어 졌다. 그런 공간 속에 있다면 그분처럼 즐거운 공상을 하며 글을 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상상을 했다. 하루 동안 타인을 만나고 가족들을 대하고 대화하고 웃는 시간들을 보내고 나면 자신과의 조용한 조우가 필요하다. 서재는 좋아하는 것으로 가득 찬 비밀 세계의 문이 되어줄 것이다. 책 속의 할머니는 삶이 늘 즐겁고 두근거린다고 말했다.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선물 상자를 열 때처럼 가슴이 두근거려요.
나의 정신세계는 어찌 보면 할머니들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어릴 적 기억 속 증조할머니는 남편과 싸운 후 야밤에 혼자 맹산을 넘어 친정에 가셨던 고집과 담력을, 주부인 생활이 불안하게 느껴질 때는 주방에서도 셰익스피어를 읽을 수 있다는 타샤 할머니의 자존감을, 죽음이 두렵게 느껴질 때는 병을 얻고서도 담담하게 자신의 모습대로 생의 끝까지 살아가신 사노 요코의 일관성을 배운다. 그리고 이제 어떤 모습으로 늙어갈지 가도노 에이코 할머니를 보며 생각한다.
자신의 라이프 스타일이 있다는 것은 중요하다. 나의 모습을 정하는 기준은 생활에서 나온다. 에이코 할머니는 소녀의 미소를 지녔다. 책을 읽고 글을 쓰며 그림을 그리는 삶이 그녀를 그렇게 만들어주었을까. 우리는 성인이 되어가며 취미를 잃어간다. 무심코 그리던 그림 한 장도 어색하다. 어쩌면 어른이 된다는 것은 놀이를 잃어가는 것이다. 그분의 활력의 원천은 바로 그런 것에서 나왔다. 나는 무언가를 배울 때 얼마 큼의 금전적 효과가 있는지, 투자 대비 미래에 유용한 것인지를 따진다. 무척 현실적이라고 자부했지만 과연 그 기준이 현실적인 것이었을까. 현실이라는 것은 사전적 의미로 현재 실제로 존재하는 사실이나 상태, 사유의 대상인 객관적, 구체적 존재를 뜻한다는데. 나는 삶을 있는 그대로 구체적으로 바라보지 못했다. 실제로 존재하는 사실은 인생은 즐거움을 찾기에도 바쁜 시간이라는 것이다.
주부로 오래 지내면 자식이 점점 자랄수록 대견한 기분도 들지만 한편으로는 나에게 의지하는 것이 사라진다는 것이 서글퍼올 때가 생긴다. 선배 주부들을 만날 때마다 얼마나 편해지셨냐는 질문을 하면 그렇다는 웃음 끝에 잠시 머금는 무거운 미소들을 잊을 수 없다. 어린아이들을 키우던 나는 마냥 그들이 부러웠었다. 밤에 통으로 잠을 잘 수 있다는 것, 커피숍을 자유롭게 가고 아이를 데리고 갈 수 없는 곳에 혼자 훌훌 갈 수 있다는 것이. 백팩은 집어던지고 작은 가방에 지갑, 열쇠, 핸드폰, 핸드크림 따위의 필요한 소지품만 챙겨서 다닐 수 있다는 것. 식당에 가서도 아이들을 조용히 시킬 필요가 없이 우아한 식사를 할 수 있고 미용실에 가서도 아이 걱정 없이 긴 시간 동안 머리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큰아이가 중학교에 입학하고 정말 스스로 하는 것들이 많아지자 나는 조금씩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그들이 머금던 무거운 미소의 의미를 이해하게 되었다. 혼자가 되기 전에 즐거운 일들을 많이 만들어야 한다. 그 시작은 아직은 아니라고 여기던 지금이 적기인지도 모른다.
난 고독을 만끽한다. 이기적일지는 모르지만, 그게 뭐 어때서. 오스카 와일드의 말마따나 인생이란 워낙 중요한 것이니 심각하게 맘에 담아둘 필요가 없다. 자녀가 넓은 세상을 찾아 집을 떠나고 싶어 할 때 낙담하는 어머니들을 보면 딱하다. 상실감이 느껴지긴 하겠지만, 어떤 신나는 일들을 할 수 있는지 둘러보기를. 인생은 보람을 느낄 일을 다 할 수 없을 만큼 짧다. -타샤 튜더, '타샤의 말' 中
무심코 해대는 하루의 밥 세끼도, 어쩔 땐 무료하게 느껴지는 오후 2시와 3시도 가볍게 넘기지 않고 나의 취향을 담아 생활한다면 나만의 라이프 스타일을 일구어 갈 수 있겠지. 반찬을 한 가지라도 더 하느라 고민하지 말고 한 그릇을 담아도 맛있고 영양가 있게 담아야겠다는 생각들을 하며 책을 훑어보는 몇 분간 나의 가슴은 점점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기대하며 사는 삶이란 작은 것부터 바꾸어가는 데 있다.
큰 아이의 문제집을 사러 갔다가 얇은 일본어 책을 샀다. 배우고 싶어서 작년 봄쯤에 시작하다 접어두었던 일. 하루의 짧은 시간이 쌓여 얼마 큼의 효과를 보일지는 알 수 없으나 보이지 않는 힘이 나를 어학 코너로 이끌었다. 언제 가볼 수 있을지 모를 일본이지만 마냥 배우고 싶은 언어. 삶은 꼭 목적이 있어야 끌리는 것은 아니니까.
나는 딸기색 립스틱이 어울리지는 않지만 내 마음에 환하게 불이 켜진다. 바쁘게 살아가야겠다는 힘이 솟는다. 무엇이 될 수 있을까 생각하기 전에 즐거운 일을 할 수 있는 오늘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에이코 할머니의 책을 사러 왠지 다시 한번 서점에 올 것만 같다.
우리 손이 닿는 곳에 행복이 있습니다. -타샤 튜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