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떡을 굽듯이

만드는 생활

by 소박하며화려한

겨울이 되면 길가 트럭에서 흔하게 볼 수 있었던 붕어빵이나 호떡이 그립다. 다른 동네는 몰라도 우리 동네는 점점 그 풍경이 사라지고 있다. 아파트 후문에서 호떡을 파시던 포장마차 할머니가 메뉴를 바꾸셨는데 왜 이제 호떡을 굽지 않으시냐는 질문에 가격이 맞지 않아서라고 하셨다. 그러고 보니 오른 물가로 밖에서 소소히 사먹는 군것질 거리들도 더이상 만만한 가격이 되지 못한다. 나부터도 언제부턴가 집에서 만들어먹기 시작했으니까.

요즘에는 여러 믹스들이 다양하게 나와서 손쉽게 만들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더 이상 밀가루 반죽을 해서 아랫목에 묵혀 발효시킬 필요가 없다. 호떡믹스, 깨찰빵 믹스, 쿠키 믹스 나아가서 감자전 믹스와 김치전 믹스까지도 판매되고 있다. 찬바람이 불면 부엌 찬장에 호떡믹스 몇 상자를 쟁여놓는 것이 정해진 순서가 되었다. 붕어빵을 먹고 싶다는 둘째의 부탁에 우리집 씽크대 안에는 붕어빵 틀까지 준비되어 있다. 가루와 앙꼬는 인터넷으로 구매하면 집에서도 붕어빵을 만들어 먹을 수가 있다. 팬 하나에 두개씩만 구울 수 있다는 것이 손이 많이 가는 성가신 작업이긴 하지만.

믹스라고 해서 호떡을 굽는 일이 손쉬운 과정은 아니다. 비닐 장갑을 단단히 끼고 잘 치대서 호떡이 여덟개가 만들어질 수 있게 공평하게 반죽을 배분한다. 작은 간장 종지처럼 우묵하게 만들어서 동봉되어 있는 설탕 속을 넣어주어야 한다. 만두처럼 오므려 모아진 부분을 밑으로 가게해서 기름을 두른 팬에 올린다. 탄생을 기다리는 알의 모양으로 드디어 뜨거운 기름과 만난다. 그 부분이 노랗게 익으면 설탕이 새지 않도록 일차적 보호막 역할을 해주는데 두툼한 호떡보다는 얇은 편을 선호해서 뒤집은 후에는 최대한 꾹꾹 눌러 납작하게 만든다. 이 과정이 손에 익을 때까지는 오래 걸리고 힘들었다. 설탕속을 제대로 넣지 못해서 어쩔 때는 설탕이 모자르거나 오히려 남는 일도 있었다. 무엇보다도 굽는 과정에서 설탕속이 터져 나오기 일쑤였다. 이스트 덕분에 반죽은 찰기가 있는 편이지만 꼼꼼하게 누르다가 설탕이 줄줄 새기도 했다. 모든 일에는 과욕을 부리면 안된다. 설탕은 적당히 넣고 누를 때도 알맞게 눌러주어야 한다.

어릴 적 내 꿈은 작가가 되는 것이었다. 여기저기 백일장을 참여하면서 구경한 세상에는 글을 잘 쓰는 친구들이 참 많았다. 잘하고 싶은 마음은 점점 커져갔지만 욕심처럼 몸집만 부풀렸을 뿐 그 시절의 나는 어떻게 해야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한번은 정호승 시인을 심사위원으로 만나게 된 적이 있었다. 선망의 대상이었던 분을 실제로 본 감격에 싸인을 부탁드렸는데 '시도 노력하는 것입니다.'라고 써주셨다. 그 한 줄은 살면서 여러번 머릿속을 맴돌았고 꿈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살면서도 한번씩 발목을 잡았다. 진정한 '노력'을 해보지 못했기에 미련이 남아있었을까. 그럼 엄마 꿈은 뭐냐고 묻는 아이들 질문에 아직도 '작가가 되는 것'이라고 답하고는 한다.

그저 저 뜨거운 팬에 놓인 호떡처럼 몸만 달아 있었다. 부풀지도 않은 반죽 주제에 많은 설탕을 품고 싶었고 더 얇게,얇게를 외치며 자신을 압박하기에 바빴다. 먼저 구워진 다른 호떡들과 비교하면서. 아이를 키우면서 책을 냈다는 엄마들의 경험담들을 보면 부럽기도 하고 그동안 글을 왜 안쓰고 살았는지 자책하기도 했다. 원하는 길과 다른 쪽으로 진학을 하게 되면서 서서히 글과 멀어진 시간들은 책을 읽는 것도 어색해지게 만들었다. 잘 쓰는 사람들이 부러웠고 마음을 울리는 문장을 만나면 감동하는 것이 아닌 뺏어오고 싶은 마음도 들었다. 욕심은 나를 삐뚤어지게 만들었다.

사람들은 하루 삼시세끼를 먹으며 살아가지만 간간히 갖는 간식 시간이 특별하다. 오후의 티타임을 기대하는 사람들도 있다. 여자들이 많은 직장에서 일하는 친구는 오히려 티타임 메뉴에 정성을 쏟다보니 살이 더 쪘다고 했다. 이처럼 삶은 정해진 루틴보다 번외편이 즐거움을 줄 때가 많다. 나의 글을 쓰는 시간도 기다려지고 즐거운 시간으로 하루의 한켠에 녹아들어갔으면 좋겠다. 그런 생활이 쌓이다보면 속이 터지지 않은 노릇한 호떡으로 구워지는 날도 언젠가 만나게 되지 않을까.

keyword
이전 19화고기의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