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추같은 인생

만드는 생활-식재료

by 소박하며화려한

원서접수를 해놓고도 도무지 공부에 손이 가지 않는다. 당장 이번주 주말에 시험을 보러가야 하는 상황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손을 놓고 있는 자신을 보면서 의아했다. 이럴거면 왜 원서접수를 했을까. 당장 필요한 시험은 아니지만 일단 파도에 휩쓸려가듯 접수도 하고 필기시험도 보았다. 마음에 없는 일을 하려니 의욕이 안난다. 필기는 어떻게 통과했지만 이번주 남은 실기가 문제다.

가정주부로 살고 있지만 미래에 대한 모습은 늘 그려보고는 한다. 아이들은 점점 크고 있고 내 손길이 적어지기 전에 어서 혼자만의 삶을 개척해야 한다. 이른 나이에 한 결혼과 출산 후 오래 쉬었던 탓에 세상에 대한 두려움은 줄어들지 않는다. 마음은 있지만 선뜻 나서지 못한 적도 있었고. 집에 있는 시간이 많은 전업주부들은 아무 계획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주변에 같이 일해보자는 제의를 갖고 접근하는 사람들도 간혹 있다. 그런 말들은 점점 나를 부정적으로 반응하게 하고 내면은 움츠러들게 만든다.

아이들이 밭에서 배추를 뽑아왔다. 학교에서 한 학급당 텃밭을 정해서 여름에는 쌈채를 수확하고 가을이 되면 배추를 수확해서 보내준다. 아이가 셋이기 때문에 배추 세포기가 집에 도착했다. 한 뱃속에서 태어났어도 개성이 다 다른 삼남매처럼 배추 세포기도 각기 그 모양이 달랐다. 첫째의 배추는 일단 실했다. 나이가 지긋한 아줌마 선생님이신데 상당히 꼼꼼한 인상이셨던 것이 기억이 난다. 배추를 끈으로 묶어서 키우게 했기 때문에 벌레먹은 부분도 없었고 알이 꽉 차있었다. 그에 반해 둘째의 배추는 속이 비어있었다.


-선생님이' 네 배추는 집에 가져가도 먹지는 못하겠다' 라고 하셨어요.

둘째의 말과 함께 받아든 검은 비닐 봉지 안에는 초라하게 구멍이 숭숭난 홀쭉한 배추가 들어있었다. 졸지에 생긴 배추에 겉절이라도 해야겠어서 손질을 하기 시작했다. 첫째의 실한 배추는 손질하는 기쁨도 주었는데 겉잎 몇장 떼고나니 겉절이의 가장 많은 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 하지만 나의 감정에는 기쁨보다 안쓰러움이 주는 영향력이 훨씬 강했는지 둘째의 속이 빈 배추는 자꾸 내 눈을 끌었고 마음이 쓰이게 했다. '먹지 못할 것'이라는 선생님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 배추를 손질해 보란듯이 먹어보리라. 둘째의 배추는 겉잎외에도 여러장을 떼어내고,떼어내야 했다. 떼어낸 잎은 국을 끓이면 되니까 괜찮아. 손질을 끝낸 후에는 현저히 작아진 초라한 배추가 손에 들려있었다.

속이 빈 그것은 어쩌면 나와 같았다. 모자른 것은 항상 마음이 아프다. 목적이 없는 시험을 보고 보이지 않는 미래를 위해 애쓰는 것은 속이 실하게 차오르고 싶은 마음에서 일거다. 누군가가 나에게 먹을 수 없는 배추라고 말할 것 같아서 노력하는 인생이지만 사실 그것은 혼자만의 자격지심이란 것도 안다. 언제나 작년보다는 한발 나은 내년,오년 전보다는 달라진 나,아이들이 몇살이 되면 이런이런 모습의 엄마로 살고 싶은데 그게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계속 일을해온 대학 동기들을 보면서 저만큼의 시간을 일한 경력으로 쌓고나면 뭔가 든든한 느낌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미래에 대한 걱정을 하고 있는 내 처지와는 다를 줄 알았는데 그들도 비슷한 불안감을 품고 있는 것을 보면서 일한 시간은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았다. 우리 모두는 다가올 보이지 않는 시간들이 두렵고 불안하다.

배추가 구멍이 많고 속이 비었다는 것은 그만큼 많은 벌레들이 살았다는 증거다. 보기 좋은 실한 배추보다는 사실은 더 많은 배추흰나비 유충들을 키워냈을 것이다. 작아진 자기 몸뚱이에서 더 많은 새로운 생명들을 하얗게 피어나게 했겠지. 그렇다면 조금 위로가 될 것 같다. 나에게도 그 배추에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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