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자야 , 미안해.

만드는 생활-식재료

by 소박하며화려한

식재료를 다듬다가 문득 감자에게 고맙다. 냉장고를 열면 무얼 해먹어야하나가 늘 고민인데 같은 모습으로 야채칸 한켠을 차지하고 있는 모습을 보니 든든하다. 활용도가 높아 반찬을 하든 찌개를 끓이든 큰 도움이 된다. 특히 찌개를 끓일 때에는 감자가 없으면 그 빈자리가 커서 얼른 사러 나가곤 한다. 특유의 전분 성분은 맑은 국물을 걸쭉하게 찌개로 바꾸어준다.

감자는 투박하다. 달거나 짜거나한 맛도 없이 담백한데 어떠한 양념에도 잘 어울린다. 껍질을 까고 나오는 백색의 속살은 어떤 요리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어요라고 말을 건다. 제철의 감자는 뜨거운 여름 햇빛을 온몸으로 받아 결실을 맺는다. 햇볕의 양분은 고소한 맛이다. 텃밭에 한번 심어본 적이 있었는데 띄엄띄엄 잘 맞추어 심어주지 못해서 싹이 엉킨 머리처럼 서로 얽혀버렸었다. 땅에서 들쑥날쑥 튀어나와버려 맛도 보지 못하고 버렸던 슬픈 추억이다.

얼굴이 하얀 친구가 있었다. 동그란 얼굴에 친절했던 그 아이는 어릴적 천식에 시달리던 내가 아파할 때마다 곁에서 도와주었다. 특별한 말재주가 있어서 뒤집어지게 재밌다거나 공부를 잘해서 부러움을 사는 아이는 아니었다. 어떤 특징도 없었지만 묵묵히 걷는듯한 그 발걸음은 기억에 남는다. 걸어가는 뒷모습이 담백한 매력이 있는 아이었다. 특유의 걷는 모습만 보아도 믿음이 가는.

자극점이 없는 무언가는 백지같아서 어떤 것도 포용하는 능력이 있다. 식재료가 없는 냉장고문을 붙잡고 고민할 때에 도움이 되는 감자처럼 그 아이는 내게 의지가 되는 존재였다. 중학교에 진학한 후 한번 더 같은 반이 되어 만날 기회가 있었다. 불과 몇년 만에 알던 모습과는 달리 연약해진 모습으로 나타난 그녀는 무척이나 말라있었다. 하얗던 피부는 오히려 창백해졌고 이제는 체육시간에 달리기를 제외해야 하는 학생에 그녀가 포함되어 있었다. 말은 더 없어졌고 항상 힘이 없던 그 아이에게 무료해진 나는 다른 생기발랄한 친구를 사귀기에 여념이 없었고 후에 소풍을 가서 알게된 사실은 나의 천식이 낫던 그 몇년 동안 그녀는 몸이 허약해졌다는 것이다. 산중턱에서 선생님께 부축을 받고 있던 친구의 창백한 얼굴 위로 식은땀이 흘러내렸고 숨은 거칠게 몰아쉬고 있었다.

나는 받은 은혜를 갚지 못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녀의 이름은 은혜, 별명은 감자였다. 그녀가 가진 이름은 나의 이기심을 시간이 흘러도 두고두고 깨우쳐주고 있다. 산에서 숨을 몰아쉬고 있던 그 때에 사실 나는 그녀를 부축해주고 있어야했다. 조용하지만 어딘가 슬픈빛이 비치는 그아이 얼굴에 웃음을 주어야 했고 쉬는 시간 혼자 앉아 있을 때 앞에서 이야기꽃을 피워 주어야했다. 텃밭에 감자도 귀찮다고 몰아심지 않았어야 했고 엉켜버린 감자줄기들도 정리했어야 한다. 멀어져버린 그녀와 나의 관계도.

아이들이 집에 들어오는 시간이 되어 손길이 바쁘다. 일찍 정한 저녁 메뉴는 이럴 때 도움이 된다. 찌개를 하기 위해 서둘러 감자를 깎으면서도 그녀의 생각이 난다. 많은 식재료 중 유난히 애착히 갔던 이유가 이야기를 하다보니 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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