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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박하며화려한 Dec 23. 2019

전업주부가 이력서를 쓰는 마음

일상생활

 -내일이라도 당장 나올 수 있나요? 당장요.

 입사를 목표로 하는 것이 구직활동이지만 나는 잠시 멈칫했다. '당장'이라는 단어는 생각보다 위압적으로 다가왔다. 그것은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일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나는 과거와 작별하는 시간이 필요했다.

 생각지도 않은 구직활동을 나서는 데에는 여러 백 마디 말보다 본론만 말하자면 결국은 '돈'때문이 아니겠는가. 한 명이라도 더 경제활동을 하기 위해서. 10년이 넘는 공백이 부유하지는 않았지만 잘 되리라는 희망을 안 고사는 나날이었는데 이번에는 많이 휘청거렸다. 다시 긍정적인 생각을 품을 수 있을 때까지는 생각의 정리가 필요했으니까. 남편은 약 부작용인지 아니면 스트레스인지 모를 탈모로 며칠 만에 평생을 함께한 머리카락들을 잃었고 나는 무거워지는 마음을 감추려고 되려 밝은 척했다. 이를테면 당신의 가장 연약한 지금의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두었다가 나에게 짜증을 내거나 화를 낼 때마다 보여주겠다라던가 아니면 골룸부터 시작해 각종 탈모와 관련된 모든 캐릭터들을 갖다 붙여 짓궂은 장난을 치거나. 당신의 머리카락은 떠나도 나는 평생 떠나지 않겠노라고 손가락 굽는 소리도 했다가. 오늘은 이렇게 보니 두상이 이쁘다 이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짐짓 진지한 표정으로 이야기하기도 했다.

 그렇게도 기복적으로 다가오는 우울감의 원천이었던 전업주부의 생활을 떠내 보내며 후련한 마음만 있지는 않았다. 당장 면접을 본 곳이 연락이 올지 아니면 원서를 넣은 다른 곳이 될지 아직 정해진 곳은 없지만 생계전선으로 뛰어들 준비운동을 하면서 나는 발을 뺄까 말까 하면서도 긴 시간 담근 채 고민만 하고 있던 정든 주부의 모습을 벗는 데에 힘이 든다. 집에 있는 생활은 나의 오래된 일과가 되었고 청소, 빨래, 식사 준비 등의 집안일들은 하루하루 정해진 과제였는데 그런 것들에서 벗어나 밖으로 나가기가 후련한 마음만 있지는 않았다. 무언가 정든 터전에서 과감한 모험심을 가지고 떠나가는 기분이고 세 아이들에게는 돌아가면서 이제는 엄마가 늘 집에 있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지시켜야 했다. 문제집을 풀어도 네가 알아서 해야 하고 모르는 것이 있어도 혼자 하라고. 막내에게는 엄마가 저녁에 들어오니 중간에 전화해서 언제 오냐고 하면 안 된다고 당부를 하였다. 약하게만 보여도 사실은 엄마가 떠날 때가 되었음을 나는 안다. 아이들은 스스로 잘 해나 갈 거고 엄마의 부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각자의 하루를 보낼 것이다. 가장 염려되는 것은 아이들의 안위가 아니라 사실은 집에서 온전히 떠나지 못하는 나의 마음일 것이다.

 인디자인을 배워서 내 손으로 책을 만들겠다고 장만한 노트북으로 구직정보를 찾고 이력서를 쓰는 것은 씁쓸한 마음이 들게 한다. 당장 1월에 시작하는 좋아하는 작가의 글쓰기 강습을 가지 못하는 것도 아쉽다. 다음 책은 언제쯤 만들 수 있을지도 불투명하다. 언젠가 하루키 책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었다. 일을 하면서도 글을 쓸 수 있다고. 낮에는 재즈바를 운영하고 밤에는 두 시간씩 글을 꼬박 써 내려가는 그를 보면서 나도 달라지는 건 없을 거라는 마음을 가져본다. 낮에는 어디서든 간호사로 살다가 저녁이 되면 다시 작가 지망생으로 돌아가는 생활을 나도 일 년간 꼬박 해낼 수 있을까. 매일매일 쓰는 생활도 해낼 수 있을까. 아니, 어쩌면 그렇게 굳어져서 둘 다 지켜나가는 사람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타로카드를 뒤집듯 명쾌하게 나오는 게 인생의 모습이 아니기에 나는 오늘 밤도 이것저것 고민을 해본다. 어떤 것을 선택해야 예스가 나올지. 어떤 길로 가는 것이 잘하는 선택일지. 이것 또한 내년의 내가 일 년 전의 나를 떠올리며 그때는 그랬지 하고 별거 없는 웃음을 흘릴 수 있는 하나의 기억이 되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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