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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남우 Dec 21. 2021

영화로 탄생한 명화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미술이 존재할 것인지 아닌지는 우리들, 대중에게 달려있다

"It is about things not said, opportunities not taken, potentials not realized, lips unkissed."

-Roger Ebert-


다른 사람이 쓴 리뷰는 읽는 것에서 그치는데, 로저 에버트라는 영화 평론가가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에 대해 쓴 일부 문장은 빌려오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영화만큼이나 아름다운 평이라고 생각한다..






'things not said'

   이 영화는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에 대한 것이다. 실제로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에 대한 기록이 전무한데, 그녀가 실존 인물이 아니라 화가의 상상 속 인물일 수도 있다는 사실이 그림을 더욱 신비스럽게 만든다. 미술이 존재할 것인지 아닌지는 적지 않게 우리들, 대중의 태도에 달려있다고  한다.1 소녀가 어떻게 뮤즈가 되었고, 어쩌다 터번을 쓰고 진주 귀걸이를 차게 된 것인지 등 기록의 부재를 상상으로 메꾸고 영화라는 또 다른 예술로 탄생시킨 것에서 후대 사람들에게 요하네스 베르메르의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라는 그림이 얼마나 걸작인지가 느껴진다.


'opportunities not taken, potentials not realized'

   그리트(스칼렛 요한슨)은 맹인 아버지를 곁에 두며 경제적 역할을 책임져야 했던 10대 소녀이다. 글을 익히기도 전에 청소를 배워야 했고 생계를 위해 하녀로 팔려갈 수밖에 없었던 17세기 하류층 여성의 삶이 드러난다. 그녀는 창문에 있는 먼지를 닦으면 캔버스에 드리우는 빛도 달라진다는 생각을 할 정도로 빛과 색감에 관해선 남다른 시각을 가지고 있다. 그림을 돈벌이 수단으로만 생각하는 장모와 예술을 모르는 아내 곁에서, 베르메르(콜린 퍼스)에게 그리트는 온전히 자신의 그림을 바라봐 주는 유일한 사람이다. 그녀의 순수한 예술성이 그에게 영감을 주었고 주인과 하녀, 화가와 뮤즈를 오가며 함께 예술을 공유할수록 그들의 관계는 점점 모호해지고 은밀해져간다.


   베르메르가 하늘에 있는 구름을 보고 그리트에게 무슨 색 같냐고 묻는 장면이 오래토록 기억에 남는다. 그리는 흰색이라고 답했다가 곧바로 하늘색, 노랑색, 회색이라고 말한다. 하늘은 하늘색, 무지개는 빨주노초파남보, 갈색 푸들은 갈색으로 그동안 내가 얼마나 사물을 단편적으로 바라보았는지를 떠올렸다. 같은 사물이라고 해서 같은 색만 있지 않고 빛이 주는 스펙트럼은 광대하다. 베르메르가 그리의 신분에 구애 받지 않았던 것은 그가 이렇게 색을 관찰하는 시각으로 그녀의 고유함을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lips unkissed'

   이 영화는 부딪히지 않은 입술에 관한 이야기이다. 포스터 속 베르메르와 그리에게선 화가와 뮤즈의 그 이상의 감정이 느껴진다. 하지만 둘은 외도라고 부를 수 있는 결정적 선을 절대 넘지 않는다. 할 수만 있다면 서로 사랑하고 싶어 하는 마음이 그들의 눈빛과 손짓에서 드러나는데, 배우들의 연기 때문에 영화는 선정적인 장면이 없음에도 선정적이라고 느껴진다. 서로에게 억눌렀던 감정을 베르메르는 아내와, 그리는 피터와 사랑을 나누며 해소한다. 베르메르와 그의 아내 카타리나는 11명의 자녀가 있었는데, 사실상 가장 최근에 임신한 아이는 그리를 향한 베르메르의 열망이 잉태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부분을 보면 정신적 바람은 육체적 바람만큼 잔인하다. 카타리나가 그리타를 모델로 한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를 보자마자 'obscence(외설적이야)'라고 뱉은 말에서 정신적 바람의 희생자였던 그녀가 느낀 배신감, 수치심, 분노가 드러난다.




진주귀걸이에 내포된 의미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그림을 처음 보았을 때 소녀에게서 어떤 감정인지 모를 애매하고 미스테리한 분위기를 느꼈다면,  스토리가 있는 영화 속 그리의 표정에서는 절제된 사랑이 주는 아련함이 느껴졌다. 진주 귀걸이의 유무로 이 그림에 대한 평이 완전히 달라진다고 하는데, 중요한 요소인 만큼 영화에서도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다.


   베르메르에게 진주 귀걸이는 그리 그 자체이다. 그녀를 처음 본 순간부터 예술적 끌림을 느꼈던 것과 마친가지로, 귀걸이를 처음 보자마자 그것을 착용한 그녀가 자신의 모델이 된 모습을 상상했다. 그의 그림 속에서 그녀는 영원히 진주 귀걸이를 한 채, 영원히 그것의 주인인 채 머물러 있다. 마지막에 그리는 베르메르가 보낸 진주 귀걸이를 전해 받으며 눈물을 흘리는데, 편지가 아니라 귀걸이를 보냈다는 점이 마치 베르메르가 그리에게 '영원한 나의 뮤즈'라고 고백하는 것 같았다. 또한 귀걸이는 그녀의 귓볼에 그가 뚫어 놓은 자국을 상기시킨다. 베르메르는 그리가 그 선명한 자국만큼이나 자신을 기억해 주길 바란 게 아닐까. 그리의 눈물은 우리가 과거를 화상했을 때 간혹 아련한 기억에 눈물이 맺히는 것과 같은 감정인 것 같다. 그녀에게 있어 베르메르는 여성과 하녀라는 신분에 제한되지 않은 예술을 알려준 사람이고, 그 귀걸이는 자신이 그에게 특별한 존재였음을 확인시켜준다. 진주 귀걸이는 그들의 물리적인 거리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정신적으로 이어 주는 매개의 역할을 하며, 그들의 사랑을 끝까지 절제된 상태에 머무르게 한다.





1 에른스트 곰브리치, <서양 미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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