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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남우 May 30. 2022

"오늘 제 얘기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늘 이른 시간대에 오셔서 클래식 바짝 연습하고 가시는 분이 있다. 재작년 내가 처음 학원에 왔을 때부터 계셨던 장기 수강생이다. 이날 그분은 주차권에 도장을 찍고 안녕히 계시라는 인사와 함께 문을 나서다가 '어른이 된 나에게'를 주제로 벽에 붙은 쪽지들 앞에서 걸음을 멈춰 섰다. 하나하나 천천히 훑어보셨다.

  "저는 이미 어른이 되었다는 어투에 괜히 반항심이 들어요. 누가 내가 어른이래!  아직 한참 모자란데. 괜히 이런 생각 든다니까요."


   그분 옆으로 슬쩍 가서 내가 말했다. 어른의 그림자만 지닌  어른의 흉내를 내고 있지만 이런 내가 어른이라고 확언하지 못한다.

   "철학 좋아하세요?" 그분이 물어보셨다.


   나는 철학을 공부하지는 않았지만 철학적 물음을 항상 떠올린다고 말했다. 삶과 죽음, 인간과 동물의 차이, 이상과 현실, 시간의 상대성···. 지나칠 수 있는 것들에 물음표를 던지고 사고하는 게 너무 즐겁다.


   그분은 최근에 기독교인이 되었다고 했다. 종교는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갖게 되는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뒤늦게 믿음을 가질 수도 있구나. 신의 존재를 부정하다가 뒤늦게 믿는 게 가능하구나. 신기했다. 그분이 스스로의 불안을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을 때 한 번 두드려 본 문이 종교였다고 하는데, 성경 속에서 본 구절들이 일상에서 딱 맞아떨어지는 순간을 여러 번 겪으면서 그들의 말씀이 틀리지 않았음을 알았다고 한다.

   '이웃을 사랑하라' 자신을 관통했다던 그 구절을 읊어주셨다. 성경에서 말하는 이웃은  울타리 안에 있는 소중한 사람들이 아니라  울타리 밖에 있는, 낯선 타인이라고 규정하는 그들 말한다고 한다. 나와 아무런 관련 없는 사람들을 포용하고 사랑하는 마음, 내가 느끼는 어른은 그러한 인간애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인  같다. 처음 보는 노인에게서  미래를 보는 , '노키드존'이라는 문구가 배척하는 이들을 떠올리는 .

   그분과 이야기 한 주제를 나열해 보면 이렇게 유의미한 대화를 한꺼번에 할 수 있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다. 사색의 시간이 부재한 현대인들, 항상 내재되어 있는 불안, 사람을 만나는 건 하나의 우주를 만나는 것과 같다는 이야기, 철학의 변증법 등 너무나도 깊고 심오한 깨달음을 주는 내용이라 메모한 내용이 한가득이다. 따로 기록해야지-




   식사시간도 생략하고 거의 두 시간 가까이 얘기했다. 나는 늘 하고 싶은 말이 많은 사람이지만 꼬리에 꼬리를 물어 이런저런 말들을 막 쏟아내는 그분을 보며 그분의 일상에 있어 대화의 굶주림이 느껴졌다. 그래서 이날은 좋은 청자가 되기로 했다.

​​

   "시간 뺏어서 죄송합니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분이 말했다.


   나는 너무 유의미한 대화라 시간 가는  몰랐다고 다음에 오셨을 때도  얘기해달라고 했다.

   "제가 3개월 동안 미국으로 출장을 가서.."


   그분은 오늘을 마지막으로 내일 출장을 가시는데 어느 때와 다를 것 없이 학원을 나서려다가 우연히 흥미를 끄는 쪽지를 보게 되었고 우연히 나와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고 했다. 이날의 우연이 없었다면 난 아마 그분을 '조용한 분'이라는 개성 없는 틀에 맞춰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돌아오시면 미국에서 본 세상에 대해 얘기해 주세요." 내가 말했다.


   ". 오늘  얘기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말과 함께 진짜 문밖을 나갔다.


   내가 하고 싶은 말들  참고 들어주기로 마음먹은   아셨나 보다. 얘기 들어주셔서 고맙다는 말에 마음이 찡하고 눈물이  돌았다. 귀는  개이고 입은 하나인 이유가 말하는 것보다 많이 들으라는 신의 의도로 해석하곤 하는데, 많이 들어서 행복한 날이었다.

이 이야기를 퇴근 후에 소금쌤이랑 막걸리 한 잔 하면서 들려주었다.


   "근데 그게 소남우쌤의 힘인 것 같아요. 뭔가 자기 얘기를 꺼내게 만드는 힘이 있어요." 소금쌤이 말했다.

   내 자아가 단단해지는 곳, 많이 말하고 많이 들으면서 희끄무레한 테두리가 점점 선명해지는 곳, 이곳은 피아노 학원이지만 그곳을 가장한 독서모임의 장소이자 보드게임 카페이자 도심 속 산장 같다. 길 잃은 사람들 혹은 걸음이 익숙한 단골들이 와서 자기 얘기를 들려주는 이곳에서 나는 그릇을 닦으면서 내 두 귀를 기꺼이 그들에게 기울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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