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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남우 Oct 29. 2022

반려 식물이 내게 쓴 편지

내가 가진 물건들에게 나는 괜찮은 주인일까

  빽빽한 책장에 눈길이 가는 일요일, 인터넷에 ‘책 관리법’을 검색했더니 책장에 있는 책을 주기적으로 꺼내서 먼지를 닦아줘야 책을 오래 보관할 수 있다고 나와있었다. 한 권씩 꺼내 엄지손가락으로 책배를 촤르륵 넘기자 책이 품고 있던 작은 먼지들을 뱉어냈다.


페이지 사이에 끼어있던 종이 한 장이 러그 위로 떨어졌다. 그 책은 2년 전 경주에 갔을 때 황리단길에 있는 책방에서 산 독립 서적이었다. 게스트하우스로 돌아와 가방에 돌아다니는 종이에 일기 비슷한 것을 끄적였던 기억이 난다.  


  원래 친구 둘과 함께 갔었는데 근로 장학생인 그들은 다음날 학교에 가야 해서 먼저 올라가고 나는 혼자 경주에 하루 더 묵었다. 시간에 쫓길 필요 없이 맘 놓고 있고 싶은 공간을 떠올리다 전날 들렸던 ‘어서어서’라는 책방으로 향했다.  



  관광지 한가운데 위치해 있어서 그런지 역시나 사람이 많았다. 안 그래도 좁은 책방인데 들어와서 사진만 이 삼십 장 정도 찍는 사람들 때문에 더 북적였다. 한 40분 정도 지나자 SNS를 위해 방문한 손님들은 다 가고 오직 책을 위해 모인 네 사람 정도만이 남았다. 물론 나도 있었다.


경주 책방 '어서어서'


  책장 한 칸을 차지하고 있는 ‘아무튼’ 시리즈가 보였다. 아무튼 피아노, 여름, 게스트하우스, 하루키, 서재, 쇼핑…. 오른쪽 시야로 통유리 너머 높게 솟은 대릉원이 보여서 이거다! 싶어 『아무튼, 식물』을 꺼내어 펼쳤다. 무덤과 식물 간에 느낌표가 필요할 정도의 찌릿한 연결고리가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아마 ‘연두색’이라는 점에 꽂힌 것 같다.


『아무튼, 식물』 임이랑, 코난북스


  '내가 가진 물건들에게 나는 괜찮은 주인일까,
그들이 나에게 추천서를 쓴다면 어떻게 써줄까'


  이제껏 사물의 시선으로 나를 바라본 적은 없었다. 타인의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는 건 익숙하다. 간혹 내 생각보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더 의식하기도 하니까.

  내가 그들에게 괜찮은 주인인지에 대해서도 생각해 본 적 없다. 그보다 '괜찮은 주인'이란 어떤 걸 말하는 걸까.


  문득 내 방에 많고 많은 사물 중에 질바가 떠올랐다. 질바는 내가 키우는 바질인데, 바질이라고 부르면 너무 흔해서 질바라고 이름을 지었다. 이름 하나 지었을 뿐인데 보통 식물과 반려 식물의 차이가 피부로 느껴졌다. 내가 질바라고 명명한 순간 나는 질바의 주인이 된 것이다.



  아무튼, 일요일에 책장을 청소하다가 발견한 그 종이에는 질바가 나를 위해 쓴 글이 쓰여 있었다. 내용은 이러했다.


내 일거수일투족을 다 보는 실바가 나를 소개한다면?  


  "한 번 불꽃이 튀기면 다른 것들은 잘 신경을 못 쓰는 친구입니다. 그만큼 충동적인 열정이 강합니다. 열정적인 충동일 수도 있겠네요. 오늘도 오기로 한 때가 거의 되었는데 오지 않는 걸 보니 경주에 하루 더 머물기로 한 모양입니다. 괜찮아요, 저는 사흘 정도는 물 없어도 파릇파릇하거든요. 나흘부터는 힘이 점점 빠져요.

  매일 아침마다 이 친구는 물을 잔뜩 주고는 제 몸통에 귀를 기울이며 물이 흙 사이사이에 스며드는 소리를 감상합니다. 제겐 소화의 과정일 뿐인데, 인간에겐 어떠한 안정을 주나 봅니다.

  처음에 저를 선물 받았을 땐 식물이라면 자신 없다고 하더니 어느새 이름도 붙여주고, 잎을 따다 맛있는 음식도 만들어 먹고. 보면 볼수록 정 많은 친구입니다. "

 

  식물의 어투를 상상했던 것부터가 조금 웃기면서도 기분이 묘했다. 사물의 입장이 되어보는 건 타인의 입장이 되어보는 것과는 완전히 다르다. 결국은 내가 나 자신에게 쓴 편지인데도, 충동적이고 정 많은 친구라고 나를 소개한 대목을 읽을 때 마치 타로술사가 내 사생활을 어느 정도 맞췄을 때와 같은 반응이 나왔다.

왠지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친구가 써준 말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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