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목표는 배추 80 포기!
올해도 어김없이 돌아온 김장철.
김치 냉장고에 김치통이 바닥을 드러내고, 묵은지 김치찌개가 유독 맛있어지는 계절이 오면 새 김장을 할 철이 왔다는 신호다. 10월 중순쯤 되면 언니 둘과 남동생, 우리 4남매는 엄마의 출동 명령을 기다린다.
"이번 김장은 11월 셋째 주야. 시간 되는 사람은 와서 수육 먹고 가."
이제는 수육보다 김치의 맛을 아는 나이가 되었지만 여전히 엄마는 우리를 고기로 꼬시려 든다. 전국 각지에 흩어져 사는 우리가 안 가면 김장은 오롯이 엄마, 아빠의 몫이기에 김장하는 날과 벼를 심는 못자리 날에는 꼭 온 가족이 모이려 애쓴다.
한 달 전부터 11월 셋째 주를 비워두고 이번엔 초등학생과 유치원생 두 아이의 기관에 미리 체험학습 신청서도 냈다. 김장을 몇 번 경험해 보니 김장하는 본 날보다 그전에 미리 준비하는 것이 훨씬 품이 많이 든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내가 어릴 때만 해도 체험학습 없이 무조건 매일 출석하고 개근상을 받는 것을 칭찬해 줬지만 이제는 시대가 바뀌어 개근상도 없어지고 체험학습 신청서를 내면 출석 인정을 받고 특별한 체험을 하고 올 수 있다.
여전히 내 머릿속엔 옛날 습관이 남아 있어서 그래도 학교에 가야 하지 않나, 걱정이 되었지만 아이들이 시골에 가서 자유롭게 뛰어놀고 김장을 구경하는 것도 큰 교육이 될 것이라 생각해 체험학습을 신청했다. 무엇보다 작년보다 김장 포기수가 100 포기에서 80 포기로 20 포기 줄긴 했지만, 여전히 부모님의 노동량은 상당하기에 조금이라도 일손을 돕고 싶었다. 그동안은 아이들이 어려 육아로 큰 도움이 못됐지만, 이젠 아이들이 제법 자라 나도 마음 놓고 김장을 도울 수 있게 된 첫 해이기도 했다.
김장 전날, 사실은 김장의 시작은 이 날부터다. 전날 미리 올 수 있었던 건 나와 아이들, 그리고 남동생이었다. 남동생은 회사에 연차를 내고 아침 일찍부터 와서 아빠와 배추밭에서 배추를 뽑았다. 허리를 굽혀 배추 하나하나 다듬으며 뽑고, 다시 트럭까지 나르는 노동은 정말 김장의 가장 힘든 부분이 아닐까 싶다. 팔, 허리, 어깨, 등 안 아픈데 없는 게 배추 뽑는 노동이다. 오죽하면 배추를 수확하는 가을철이면, 이삿짐센터 팀처럼 배추 수확만을 전문으로 하는 팀이 시골 빈집에 묵으며 몇 날 며칠을 머무르며 배추 수확을 하는 게 당연한 풍경일 정도이다.
남동생이 회사에 연차를 내고 오지 않았다면 아빠도 사람을 구해 배추를 뽑으려 했지만, 다행히 남동생이 연차를 낼 수 있어 둘이 수확을 했다. 배추를 다 뽑은 뒤에는, 커다란 통에 적절한 양의 소금을 넣어 배추를 미리 절여 놓는다. 예전에는 부모님께서 절임 배추 사업을 하실 정도로 크게 전문으로 하셨지만 더 이상 그렇게 고된 노동을 할 수 없어 일을 줄였다. 아빠는 소금물의 적절한 농도와 배추를 절이는 시간, 뒤집는 시간까지 정확하게 맞추어 아삭하고 맛있는 절임 배추를 준비해 두셨다.
엄마가 인근 기업에 취직을 하셨다. 엄마가 없는 집은 텅 비어버린 것 같다. 아무리 다른 가족들이 북적여도 엄마가 없으면 집주인이 사라진 기분이다. 무슨 일이든 엄마를 찾게 되고, 엄마가 있는 것만으로 의지가 되기 때문이다. 우리 아이들이 엄마가 늘 집에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바람이 무엇인지 알 것 같다. 그럼에도 엄마가 취직을 선택한 여러 사유가 있었기에 그 선택을 존중한다. 엄마가 없는 집에 나와 아이들은 점심 무렵에 도착했다. 남편은 회사에 연차를 낼 수 없어서 퇴근 후 기차를 타고 따로 내려오기로 했다.
아이들은 도착하자마자 신나서 마당으로 뛰어 나갔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자유와 기쁨이라는 두 날개를 달고서 온 동네를 뛰어다닌다. 조용하던 시골 마을에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가득 차오르고, 적막한 시골의 공기를 채우는 소란에 창문을 열고 내다보던 동네 어르신들은 초코파이며, 귤이며 온갖 간식을 들고 나와 아이들 손에 쥐어 주신다.
흐뭇한 표정으로 멀리서 아이들을 바라보다가 거실 바닥으로 시선이 향한다. 아이들마저 사라진 집 안에 나와 '무'만 남았다.
오전 내 배추를 수확한 아빠와 남동생은 무까지 밭에서 다 뽑아와 깨끗이 씻어 다듬어 놓았다. 이제 채를 썰어야 한다. 우리 집 꼬맹이 얼굴보다 더 크고 푸릇푸릇한 무가 당당하게 어깨를 쫙 펴고 나에게 도전장을 내민다. 작년의 나를 기억하는 무는 나의 얄팍한 손을 비웃는 것 같지만, 내가 하지 않으면 엄마가 퇴근 후 하게 된다. 작년과 오늘의 나는 다르다. 운동 6개월 차의 운동 새싹이 되어 새로 태어났다.
자, 이제 시작해 볼까?
나름 반년 간의 운동으로 체력이 올라간 나는 2시간 넘게 운전 후에도 아직 몸이 가뿐하다. 운동을 시작하기 전에는 운전만으로도 골골대며 방에 드러누었겠지만, 지금은 다르다. 오전 내 아이들 짐을 싸고, 차에 나르고 운전까지 했지만 아직 힘이 있다. 운동을 할수록 티는 안 나지만, 소복소복 쌓이는 눈처럼 어느새 튼튼해지는 나 자신을 발견하고 있다. 아직은 하루 이틀 쉬면 금세 녹아내리는 근력이지만, 전보다 훨씬 힘이 붙었다는 걸 스스로 느끼고 있다. 어쩌면 몸보단 마음이 먼저 단단해진 건지도 모르겠다.
무 25개, 덤벼! 해보자! 할 수 있다!
끝나지 않는 무와의 싸움. 특히 저 초록 부분은 시간이 지날수록 물기가 말라 채 써는 게 무척 까다로웠다. 결국 남동생의 도움으로 무와의 전투를 마쳤다. 동생은 채 썰고, 나는 채칼로 다 썰지 못한 끝부분을 칼로 나박나박 썰었다. 이 많은 무를 끝내고 나니 성취감이 북받친다. 한편으론, 남동생이 결혼하고 나면 이걸 누가 다하나 은근한 걱정도 생긴다. 지금은 미혼의 남동생이 자유롭게 시간을 써가며 힘든 일을 도맡아 하는데 언젠가 이곳이 누군가의 '시댁'이 되면 쉽지 않은 일이란 걸 알기 때문이다. 그땐 뭐, 또 다른 길이 열리겠지.
본 김장을 하는 날. 부모님과 4남매, 형부들과 아이들이 모두 모였다. 해마다 김장을 같이 하는 큰 집도 함께했다. 제1조는 절임배추 담당이다. 전날 미리 절여둔 배추를 꺼내 물기를 빼고, 흐르는 깨끗한 물로 네 번에 걸쳐 배춧잎 사이사이를 깨끗이 씻는다. 마지막엔 배추의 초록색 부분과 심지를 한번 더 정리한다.
허리를 굽히고 서서 배춧잎 하나하나를 씻는 게 보통 일이 아니다. 물기를 머금은 배추는 무겁고, 물은 차갑고, 순서가 밀리면 배추가 쌓인다. 구석구석 깨끗하게 그러나 배추가 상하지 않게 조심히 씻어내는 노하우가 필요하다.
제2조는 양념을 맡는다. 아침 일찍 밭에서 뽑아 깨끗이 씻어 다듬어둔 대파를 어슷 썬다. 마찬가지로 땅의 힘으로 기른 갓 뽑은 갓을 자박자박 썰어 넣고, 올해 농사지어 수확한 햇 고춧가루를 듬뿍 넣고, 새우젓과 삶은 호박 등 부모님이 키워낸 농산물들을 아낌없이 부어 섞는다. 양념의 제일 밑바닥에 어제 나의 양팔과 맞바꾼 무채가 수북하다.
우리 가족 입맛에 딱 맞는 김장 양념이 완성되었다. 먹어봤을 때 조금 짭조름해야 배추와 맞닿았을 때 적당한 간이 밴다. 엄마, 아빠의 심의를 거쳐 완성된 양념을 엄마가 배추 속 하나를 뜯어 그 위에 올린 뒤, 내 입에 쏙 넣어주신다.
"간이 어때?"
나는 배추를 입 안에 가득 문 채 고개를 세차게 끄덕이며 엄지 손가락을 들어 올린다. 꿀맛이다. 역시 엄마, 아빠의 간은 딱 적당하다.
깨끗이 씻은 배춧잎 사이사이 양념을 채워 넣는다. 속을 너무 많이 넣으면 김치가 지저분해지고, 너무 적게 넣으면 간이 안 밴다. 김장의 맛을 좌우하는 하이라이트는 속 넣기다. 엄마, 아빠는 말씀하신다.
"배추 속 넣는 거는 아무나 못해."
그 말을 증명하듯, 배추 속을 너무 많이 넣던 큰 형부가 자리에서 아웃당하고 작은 언니가 투입된다. 그런데 중간중간 아이들 때문에 자꾸 자리를 이탈해 다시 나와 교체당한다. 엄마의 손놀림을 어깨너머로 배우며 열심히 속을 채우는데 막히는 주말의 고속도로를 뚫고 큰집 식구들이 이제야 당도한다. 나는 자연스레 또다시 큰 엄마와 자리 교체.
추석에 와서 열심히 따먹었던 밤나무와 상수리나무, 바람이 불 때마다 온몸을 촤르르 떨며 우리 얘기를 엿듣는 듯 웃어젖히는 자작나무, 머리가 하늘 끝에 닿을 것만 같은 미루나무, 먹기 딱 좋게 익은 감나무 밑에서 김장을 했다.
어떻게 알았는지, 동네 아주머니 한 분이 고무장갑을 끼고 나타나셨다. 아직 우리 마을엔 동네 정이 남아 있어 친한 이웃끼리 김장을 돕는다. 김장을 못하는 집엔 김치를 나눠주기도 하고, 재료를 서로 맞바꾸기도 한다. 홀연히 나타나신 동네 아주머니는 우리 엄마 바로 아랫 자리, 부반장 자리를 꿰찼다. 모든 걸 엄마에게 물어보며 바쁜 엄마의 손놀림에 브레이크를 걸던 우리는 아주머니의 등장으로 질문을 나눠서 할 수 있게 되었다. 아주머니는 김장 위에 덮는 초록 배추를 어떻게 잡고 물기를 짜야하는지, 배추를 헹굴 때 떨어진 치러기들을 어떻게 요리할 수 있는지, 대용량 밥을 어떻게 안치는지 등을 알려주셨다.
딸 부잣집 이장댁에 막내아들로 태어난 '귀남이', 남동생은 어렸을 때부터 아빠 일을 많이 도와드렸다. 부모님은 딸들에겐 농사일을 하나도 안 시키고 귀하게 키웠지만, 남동생은 어릴 때부터 자주 호출당했다. 그래서 아빠가 하는 일은 곧잘 해내는 남동생이 이번에도 뚝딱 아궁이를 만들었다. 사람이 많아서 수육도 대용량으로 삶아야 하다 보니 가스불로는 감당이 안 됐기 때문이다. 타닥타닥 나뭇재가 타들어가고 구수한 수육 냄새가 코끝을 간지럽힐 무렵 김장도 끝이 보였다.
남은 김장 속으로 호박지와 파김치까지 뚝딱 만들어 내는 엄마의 놀라운 솜씨!
식구가 많다 보니 파김치를 담글 쪽파도 산을 이룬다.
수육이 뽀얗게 익어가고 밥은 밥솥이 넘칠 듯 차올랐다.
수육과 겉절이, 새우젓의 환상적인 만남!
연로하신 할머니도 김장을 담그는 산으로 올라오셔서 같이 점심을 드셨다. 나뭇잎이 우수수 떨어지는 나무 아래서 못다 한 이야기들을 나누자니 가족들의 웃음소리로 산이 가득 찼다.
김장을 마치고 뒷정리로 또 한 나절을 보냈다. 사용한 고무장갑, 앞치마, 장화 등을 빨아 햇볕에 널어두고 사용한 모든 기구들을 깨끗이 씻어 정리한다. 각자 집에 가져가 김치 냉장고에 넣을 김치 통을 하나씩 챙기고, 나머지는 저온 창고에 가득 쌓아둔다. 80 포기의 배추와 갓김치, 파김치, 호박지 등이 부모님의 마음처럼 풍성하게 채워졌다. 부모님은 노인정에 한 통, 혼자 사는 어르신 댁에 한 통, 일을 도와주신 아주머니 댁에 한 통 여기저기 나눠 드릴 것들을 배분하고 우리가 일 년 내 한 통씩 가져다 먹을 것들도 챙겨 놓았다.
아이들은 수육은 먹는 둥 마는 둥 하더니, 곳곳에 널려있는 간식거리들을 탐하며 노느라 바쁘다. 일 년 내내 시골에서 살고 싶다는 우리 아이들은 장화가 흙 몽둥이가 되고, 잠바엔 풀 꽃이 가득 붙고, 입 가엔 홍시의 붉은 즙을 묻힌 채 동물들에게 먹이를 주느라 바쁘다. 염소, 닭, 소 등 아이들을 보며 자기에게 먹이를 더 달라고 울어대는 동물들은, 서로에게 즐거운 친구가 된다. 한쪽은 먹이를 줄 수 있어 재밌고, 한쪽은 다양한 먹이를 먹을 수 있어 행복하다.
이번 김장도 가족의 축제였다. 일주일이 되어가는 지금도 온몸이 후들후들하지만 몸살은 나지 않았다. 이것도 그간 쌓아 올린 운동의 효능이리라. 서로가 힘들까 봐 더 나서서 하다 보니 몸은 힘들었지만 정서적인 기쁨은 가득했다. 김장을 끝낸 저녁은 내가 미리 택배로 주문해 둔 전복과 낙지로 해물 연포탕을 만들어 대접했다. 가족들이 모일 때마다 식사 준비로 고생하는 엄마를 도와드리고 싶었고, 고생한 가족들에게 건강한 음식을 만들어 주고 싶었다. 다들 맛있게 먹어주어 고마움과 동시에 저녁 준비까지 하고 나니 몸이 마비가 되는 것 같았지만 뿌듯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우리가 언제까지 이렇게 김장을 할 수 있을까? 아마 부모님이 건강하게 계시는 동안만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면 김치 한 조각, 한 조각이 너무 귀하고 애틋한 마음마저 든다. 마트에서 사 먹는 김치는 도저히 따라올 수 없는 우리 가족만의 깊은 맛과 정성이 담긴 김치.
내가 어릴 때, 마당 아궁이에서 명절마다 두부를 만들던 풍경을 잊지 못한다. 지금은 두부를 좋아하지만, 그땐 그렇게 좋아하는 음식은 아니었는데 그날의 구수한 공기와 따뜻한 풍경이 지금까지도 마음을 녹인다. 우리 아이들에게도 오늘 누리는 시골의 풍경과 경치와 경험이 평생의 따뜻한 공기가 되어 주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