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교회는 안녕한가요?
갓 스무 살을 넘겼을 무렵, 내가 다니던 교회는 옛 경춘선 철길이 지나는 허름한 동네에 자리했다. 더 예전에는 시간마다 기차가 지나다녔고 사람들은 그 시간이면 발을 동동 구르거나 아무렇지도 않게 철로 안전 차단선이 열리기를 기다리던 서울 외곽이었다. 당시 자취하던 원룸에서 나와 아파트 촌을 지날 때면 그리운 엄마 냄새가 났다. 해 질 녘이면 TV 앞에 앉아 엄마가 해주시던 밥을 기다렸다. 원룸엔 없는 TV가 아파트 거실 창으로 비치면 엄마의 얼굴이 보이는 듯했다. 거실에 TV가 있으면 가족이 살고 있을 거라는 막연한 기대감이 생겼고 마음속에 구름을 두둥실 피워 엄마가 있는 고향으로 띄워 보냈다.
기차 철로 위 육교를 건너면 같은 동네에서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영화에서나 보던 판자촌이 얼기설기 엉킨 호박넝쿨처럼 모여 있었다. 오래된 빌라 위로 아무렇게나 지붕과 옆면을 가린 임시 건물이 제멋대로 붙어 있었고, 철로를 따라 세운 콘크리트 담장을 벽처럼 사용하는 판잣집들이 길게 이어졌다. 길바닥에 상을 피고 주점을 차린 끝 집에는 늘 낡은 옷차림의 사람들이 가득했다. 그 길에서, 너무 오래 들어 첫 음만 들어도 아는 인디 노래를 들으며 생각에 잠기곤 했다.
어지러운 뒤안길로 이어진 빌라촌을 지나면 엘리베이터도 없고 화장실 변기는 자주 막혀 고장 나기 일쑤인 살구색 빌딩이 나왔다. 경비 아저씨는 늘 화가 나 있었고 상냥하게 인사해도 툭하면 싸움을 걸어왔다. 그런 경비 아저씨 눈을 피해 3층에 올라서면 언제나 열려 있는 우리 교회다. 유치원으로 쓰던 장소를 교회로 바꾸기 위해 당시 몇 안 되는 성도들이 모두 발 벗고 나와 두 손에 분홍 고무장갑을 질끈 끼고 철 수세미로 바닥을 박박 닦아세운 곳이다. 마음이 어지럽고 외로운 날이면 교회를 찾았다. 잘 치지도 못하는 피아노를 띵동 거리고, 미리 와 있던 다른 사람들과 노래도 부르고, 떡볶이로 배를 채우며 영화도 보았다. 그렇다고 늘 북적이진 않았다. 때론 나 혼자 일 적도 있었는데 괜히 예배당 불을 켜는 것도 손이 떨려왔다.
바로 그때가 그런 날이었다. 찬 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초겨울 추위의 가을에 교회에 혼자 앉아 있었다. 자유롭게 시간을 보내다 집에 가려는데 늘 열려 있는 교회 입구에서 한 남자와 마주쳤다. 키는 나보다 훨씬 컸고 덩치도 두 배는 됐다. 두툼한 손에는 공사장 인부처럼 목장갑을 끼고 검은 망치를 들고 있었다. 가방에는 뭐가 그리 많이 들었는지, 의자 위에 올려두면 이인분은 차지할 것 같았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성큼 얼굴을 가까이 들이대며 말을 걸었다.
“여기 담임 목사 어디 있어요?”
당황한 나는 연유도 제대로 묻지 못하고 지금은 없다는 말만 하고 황급히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철길까지 달려와서야 놀란 심장을 진정시키며 목사님께 전화를 걸 수 있었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에 몸에 불이 난 기분이었다. 그런데 목사님은 아주 태연하게 반문했다.
“네가 교회인데 주인이 도망가면 어떡하니. 다시 가서 무슨 일인지 여쭤보고 내가 곧 가겠다고 전해라.”
몇 번을 종종거리다 다시 교회로 향했다. 내가 교회의 주인이다. 내가 교회다. 내 몸이 성전이다. 이런 말을 숱하게 들어왔지만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하지만 그 순간 그 말이 머리에 들어와 중심에 자리를 잡았다. 차가워진 손으로 무거운 교회 문을 열었다. 다시 만나서 할 말들이 머릿속에 떠다녔다. 하지만 교회에는 아무도 없었다. 다시 교회 문을 닫고 나오며 커다란 숨을 터뜨렸다.
위험한 일이었지만, 이후 ‘교회’에 대한 내 인식이 완전히 바뀌었다. 교회는 예배를 드리고 사람들이 모이는 물질적인 장소를 넘어서 나 자신이다. 평소의 내 삶이 그리스도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허울뿐인 거짓이다. 주일마다 교회에 가는 것이나, 누군가의 평가를 넘어서 내 마음의 주인이 누구인가를 묻는 작업은 고달픈 일이다. 아무리 들여다봐도 부끄러움 투성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하면 진정한 교회에 가까워질 수 있을까 고민할 때, 나만의 해답을 찾았다.
보수적 신앙에 의문을 던지며 우리 시대의 C.S 루이스라고 불리는 레이첼 헬드 에반스는 성경을 다시 읽을 것을 권유한다. <다시, 성경으로>라는 저서에서 “성경도 마찬가지다. 성경을 읽는 것은 학회에 초청받는 것이 아니라 링 위에 오르는 것이다. 하나님은 긴 세월 내려온 생생한 대화의 장으로 우리를 초대하셨다. 창세부터 이어져 온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이 주고받는 이야기가 이제 하나씩 펼쳐진다. 운이 좋다면, 당신도 절뚝거리게 될 것이다.”라고 강조한다. 이에 대해 목회자들의 목회자로 불리는 유진 피터슨은 <다윗: 현실에 뿌리박은 영성>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 문제는 단순히 천국 전문가들이 살균 처리된 신학 연구실에서만 다룰 문제가 아니라 바로 이 땅 위에서 다루어져야 할 문제다.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과 같이, 땅에서도….” 이 땅과 이 땅의 상황-날씨, 소화, 가족, 직업, 정부-이 우리가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는 상황을 정의한다."
요즘 성경을 다시 읽고 있다. 누군가 들려주는 강론이 아니라 나에게 찾아오는 ‘이야기’가 무엇인가에 귀 기울인다. 성경의 절반 정도를 읽은 지금 드는 생각은, 시대의 한계와 무지 속에서 허우적대고 잘못을 저질러도 하나님은 당신을 찾는 사람을 원하신다는 것이다. 미리 경고하고 할 일을 앞서 알리신다. 인내와 사랑이다. 감동과 경탄이다.
누군가 물었다. 요즘 교회 생활이 어떠냐고. 나는 대답하고 싶다. 내가 매일 무슨 일을 하고 어떤 생각을 하는지, 무엇을 원하며 살아가고 있는지 말이다. 교회는 도시를 가득 채운 현란한 네온사인 속 십자가 건물이 아닌, 바로 나 자신이므로.
2022.1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