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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돋을볕 Nov 18. 2022

김밥 싸는 날

어릴 적 엄마가 해줬던 대로 김밥을 만다.

아직 어두컴컴한 갓밝이에 귓가를 울리는 알람 소리. 세상에서 가장 듣기 좋은 소리도 알람으로 해놓으면 싫어지는 재주를 가졌다. 아무리 청아하고 맑은 음 혹은 즐겨 듣는 노래로 알람을 해놓아도 소용없는 짓이다. 뜨끈한 이불과 한 몸 되어 중력에 신체를 내어 맡긴 채 무의식이 의식을 이끄는 황홀한 나라에서 어김없이 나를 끄집어내는 게 알람이다. 특히 평소보다 더 일찍 단잠에서 깨어나야 하는 날이면 중력에 복종한 내 몸은 꼼짝도 안 하고, 의식과 몸의 실랑이가 이어진다. 그래도 일어나야 한다. 결국엔 일어나야 한다. 지금 눈을 뜨지 않으면 줄줄이 지각이다. 요가 강사가 늘 하던 말대로 손가락과 발가락을 꼼지락꼼지락 움직여본다. 내 옆에, 나뒹구는 낙엽처럼 온갖 오묘한 자세로 아들 둘이 동그란 배를 내밀고 자고 있다. 오늘은 첫째가 처음으로 현장 체험학습을 가는 날이다. 어제부터 새로 산 옆 가방을 혼자 여닫고, 도시락 뚜껑과 수저를 챙기는 연습까지 해놨다. 그런데 엄마가 늦어야 쓰랴.


  어릴 적 엄마가 해줬던 대로 김밥을 만다. 오이와 당근을 채 썰고 햄, 맛살까지 차례로 살짝 익히고, 달걀을 풀어 기다랗게 썰어 낸다. 시금치는 소금물에 살짝 데쳐 조물조물 나물을 무치고 단무지와 우엉의 물을 쪽 뺀다. 고슬고슬 안친 잡곡밥에 참기름과 깨, 소금을 넣어 싱겁게 간을 한다. 앞뒤로 살짝 구운 김 위에 밥을 얇게 펴고 오색빛깔 재료를 넣어 동그랗게 말아 접시에 척척 올린다. 부스럭대는 소리에 잠에서 깬 첫째가 자기도 돕겠다며 나선다. 현장 학습 도시락으로 무엇을 싸 줄까? 물었을 때, 엄마가 싸 준 김밥!이라고 외쳤던 아이다. 요즘 유행하는 캐릭터나 귀여운 동물 모양 도시락이 아님에 속으로 내심 얼마나 안도했던지. 첫째는 뭐든 직접 해보고 싶어 한다. 최근에는 쌀을 씻어 전기밥솥에 안치고 카레를 냉장고에서 꺼내 전자레인지에 돌리는 것까지 배웠다. 물론 그 후폭풍은 물바다와 부엌 온 바닥에 굴러다니는 쌀 알갱이지만 말이다. 이번에도 자신도 해보겠다고 나서 참기름 당번을 시켜줬다. 기름 솔에 참기름을 살짝 묻혀 둥글게만 까만 김밥 위에 제법 고르게 솔질한다. 잘한다고 칭찬했더니 이번엔 칼까지 들고 나선다. 하는 모습이 기특해서 조심히 해보라고 했더니 두껍고, 얇게 삐뚤빼뚤 오묘하게 썰어 낸다. 그 위에 깨를 솔솔 뿌려 주니, 자기가 직접 만든 김밥이라 더 맛있다며 작은 눈을 반짝인다. 동그랗게 부풀어 오른 아이의 볼이 들쑥날쑥 움직이며 자긍심을 드러낸다.


  엄마를 닮은 김밥을 싸고 있자니, 저절로 어린 시절이 떠오른다. 유치원에 다닐 때부터 고등학생 때까지 소풍 가는 날마다 엄마는 김밥을 싸주셨다. 급식 세대라 평상시에 도시락은  갖고 다녔지만, 소풍 가는 날이면 어김없이 3 찬합을 들려주셨다. 어릴 때는 양이 너무 많아서 집에 오는 버스 안에서까지 먹었는데, 고등학생이 되자 그게  이렇게 창피한지 손이 너무 부끄러웠다. 친구들이 분식집에서  오는 하얀 밥에 속이 다양하고 얇은 김밥이 부러웠다. 친구들은 김밥을 먹고 담겨 있던 일회용 스티로폼을 버리고 가볍게 다녔는데, 나는  때도  때도 나무 위에 옻을 칠한 3 찬합을 들고 다녀야 했다. 게다가 선생님과 버스 운전기사의 도시락이나 간식까지 챙겨주셔서 가방이 터질  같았다. 1단에는 엄마가  김밥이, 2단에는 할머니가 만든 유부초밥이, 3단에는 아빠가 깎은 과일이 소복이 들어있었다. 너무 많다고  층만 싸줘도   먹는다고 말해도 친구들과 나눠 먹어야지,  혼자 먹냐며 핀잔만 돌아왔다. 아침에는  김밥과 콩나물국을 먹었다. 식탁에 앉은 할아버지는 나에게 고양이  먹지 말고 많이  먹으라며 성화면서도 가서 원하는  사라며 용돈을 쥐여주셨다.  무거운 도시락 가방이 부끄러워 빨리 집을 나서려 발을 동동거리면, 할머니는 목소리 좋아지라며 날달걀에 노른자만 분리해서 참기름  방울을  떨어뜨려 입에 넣어 주셨다. 향긋한 참기름 냄새와 부드럽고 싱싱한 노른자가 식도를 간질였다. 우리 가족은  손이 크기로 유명한데, 아빠는 항상  과자를 까만 봉지 가득 사와 건네주셨다. 이제는 내가 김밥을 싸서 도시락통에 담는데, 통이 너무 작은  같아 다른  하나를  꺼내 3 도시락을 만들었다. 혹시 모자를  하는 마음에 자꾸만  담게 되었다. 그랬더니 아이가 옆에서 “엄만 내가 돼진  아나 . 내가 그걸 어떻게  먹어? 너무 많아하고 내가 했던 말을 내뱉는다. 자꾸만 나는 엄마를 닮은 엄마가 되어 가는  같아 피식 웃음이 났다. “너만 먹지 말고 다른 친구들도 같이 먹어. 혹시 도시락    친구 있으면   주고.” 아이는 도시락   오는 친구는 아무도 없을 거라며 무거워서  개만 들고 가겠다고 입을 삐죽 내민다. 아이의 가방에 도시락, 과자, 음료수, , 물티슈 등을 넣고 보니 내가 봐도 가방이 너무 크고 무겁다. 어쩔  없이 김밥  하나를 뺐다.


  엄마가 소풍날마다 김밥을 싸던 일을 이제 나도 시작한다. 이제야 출발선 앞에 섰는데 내가 아이보다  긴장한  이날을 맞이한  같다.  훗날의 이야기겠지만 언젠가 아이도 이날을 기억하면 좋겠다. 현장 학습 가던 날에  안을 가득 채우던 고소한 김밥 냄새, 부족한  없이 차곡차곡 들어있던 가방  준비물들, 따뜻한  맞춤과 마음을 묻는 목소리, 현관문 앞에 서서 머리에 손을 올린  나직하게 들려주는 축복기도와 커다란 포옹을 말이다. 아이에게 점수보다 따뜻하고   마음을 물려주고 싶다. 내가 받았던 사랑과 축복에 진심을 담아 건네주고 싶다. 학원에서   없는 진짜 재밌는 경험으로 오늘이 행복한 아이로 자라기를 바란다. 부모의 욕심과 기대에 부응하지 않고 자기 시간의 주인으로 누리기를 원한다.


  『그리스인 조르바』를 쓴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조르바’를 이렇게 묘사한다.

  “조르바는 내가 오랫동안 찾아다녔으나 만날 수 없었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그는 살아 있는 가슴과 커다랗고 푸짐한 언어를 쏟아 내는 입과 위대한 야성의 영혼을 가진 사나이, 아직 모태인 대지에서 탯줄이 떨어지지 않은 사나이였다.”


  아이들이 이런 모습으로 자랐으면 좋겠다. 좋아하는 일을 마음껏 하고, 시간에 쫓기지 않으며 살아있는 가슴과 커다랗고 푸짐한 언어를 내는 입과 위대한 영혼을 가지고 자유롭게 대지를 누비기를. 그렇게 당연한 모습으로 자라기를 꿈꾼다.


2022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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