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돋을볕 Feb 27. 2023

"당신은 희망퇴직 대상자입니다"

죽음을 생각하는 사람들/ 주머니 속에 접어둔 마음

<죽음을 생각하는 사람들>


일정을 마치고 집에 오는데 집 앞 도로에 응급 구조 차들이 가득했다. 소방차, 경찰차, 사다리차, 긴급 구조 차들이 도로를 가득 메웠다. 처음 보는 종류의 차들도 있었는데 누가 봐도 비상 출동한 응급 인력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한쪽 인도는 가드 라인으로 막혀 있었고, 큰 사거리 이곳저곳에서 사람들의 시선은 한 곳을 향했다. 십 층을 훌쩍 넘기는 고층 대형빌딩 앞에 소방관 몇 명이  공기안전매트를 붙잡고 있었다. 건물 안으로 뛰어 들어가는 경찰관의 뒷모습이 보였다. 불이 났다기엔 연기가 없었고, 인질극이라기엔 구경하는 사람들의 얼굴이 무표정이었다. 그때 누군가 쑥덕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한 여학생이 옥상 난간에 걸터앉아 있대요. 아직 뛰어내리진 않았나 본데..."


  저 건물은 주로 대형 학원들로 채워진 건물이다. 한 층에도 여러 개의 스터디 카페가 있고 아침 열 시를 시작으로 무수히 많은 학생들이 줄지어 들어서고 나오는 곳이다. 사람들의 생각은 자연스레 학업 스트레스로 귀결되었다. 얼마나 힘들길래 저 높은 곳에서 뛰어내릴 생각을 했을까. '아직'이라는 말이 뼈아프게 다가왔다. 사람들의 무표정과 시선에 소름이 돋았다. 발 길을 재촉해 집으로 향하는데 출동한 차들이 한 두대씩 빠져나갔다. 공기안전매트도 접혔다. 건물에서 나오는 여성의 얼굴은 보지 못했지만, 여전히 많은 학생들이 슬리퍼를 끌며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학생은 집으로 갔을까, 병원으로 갔을까? 미국에서는 응급실에 정신건강의가 있다고 한다. 자살을 시도한 환자들의 심리를 똑같이 응급 상황으로 보는 것이다. 이번에는 살아남았지만 다음에는 언제 떠나게 될지 아무도 알 수 없다. 그리고 그 사람이 내 가족이 아니라고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주머니 속에 접어둔 마음>



  결혼한 지 십 년이 조금 넘었다. 이제는 남편 얼굴 근육의 미세한 떨림이나 눈동자만 봐도 대충 분위기를 파악할 수 있는 지경에 이르렀다. 방금 본 충격적인 사건을 전하는데 남편이 의외의 대답을 한다.


  "사람은 누구나 죽음을 생각하지. 나도 죽음을 지척에서 느껴."


  남편의 심드렁한 대답이 마음이 들지 않았던 나도 한 마디를 보탰다.


  "당연히 나도 죽음을 생각해. 하지만 그걸 생각만 하는 것과 실행에 옮기는 것은 큰 차이가 있잖아."


  이윽고 남편은 주머니에 감춰둔 물건을 꺼내듯 조심스레 뒷말을 잇는다. 마치 오늘 점심은 뭘 먹을지 묻듯이, 아이 방학이 언제 끝나는지 세듯이 자연스럽게 몸을 움직이며 소리를 냈다. 하지만 목소리는 떨려왔고 시선은 엉뚱한 곳을 향했다.


  "팀장이 나보고 희망퇴직 대상자래. 회사 더 다닐지 말지 생각해 보고 알려달래."


  나는 손에 들고 있던 소금통을 떨어트렸다. 바로 옆에 있는 남편의 목소리가 저 멀리 운동장에서 외치는 소리처럼 아득하게 느껴졌다. 아이들은 어리고, 나는 경제 활동이 없고, 남편은 이제 막 숫자 '4'를 달고 사는 나이에 들어섰다. 이 직장에서 10년 넘게 일하며 그 분야의 전문가가 되었고 여전히 하루종일 일해도 다 하지 못할 만큼의 업무가 있다. 희망퇴직 대상자 통보를 받은 날에도 출장을 가고 보고를 하고 수시로 업무 연락을 받았다. 퇴직 여부를 말해야 하는 날에는 출장 보고를 하는 날이기도 했다. 남편과 나는 하루에도 여러 번 문자와 전화를 하지만 요 며칠 내가 연락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 아이들이 방학이라 정신이 없었다. 첫째의 공부를 봐줘야 했고, 둘째의 병원 치료를 매일 다닌다. 고작 이틀 만에 남편의 세상은 산산조각 나 있었고 어두운 지하 세계를 헤매고 있었다. 남편의 그 거대한 암흑은 순식간에 나까지 집어삼켰다.


  희망퇴직 대상자라는 말에는 회사에서 희망하는 퇴사 대상자가 되었다는 뜻이 담겼다. 당신은 우리 회사에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존재다, 월급만큼의 값어치를 하지 못한다, 며칠 안에 빠른 답변을 해달라, 10년이 넘는 시간은 아무것도 아니다. 입 밖으로 내지 않았지만 누구나 느끼게 되는 이 메시지가 심장에 박혀 남편의 정신을 가맣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힘든 업무에 퇴직 메시지를 들었으니 남편은 살았으나 죽은 것과 마찬가지인 신세가 되었다. 어쩌면 인식 밖으로 꺼내고 싶지 않았던 무의식에서는 이미 예견했던 일인지도 모른다. 얼마 전 CEO가 구조조정 전문가로 바뀌었고 작년부터 뉴스에서는 업계 여기저기에서 희망퇴직을 받고 있다는 기사가 보도되었다. 남편 회사에서도 전혀 다른 일을 시작하거나 무리하게 대출을 내 부동산을 사들이는 사람들이 늘었다고 했다. 입사는 까다롭고 오랜 시간이 필요했지만 퇴사는 빠르고 쉽게 이루어진다. 아무리 평생직장이 없는 시대라고는 하지만 이렇게 비참하게 문 밖으로 내몰릴 수 있는 걸까. 그동안 너무 쉽게 '실직자'라는 말을 내뱉었던 건 아닐까. 퇴직금이라도 두둑이 챙길 수 있을 때 나가는 게 좋을 거라는 메시지가 바늘처럼 날카롭게 척수를 파고들었다. 지금 회사가 희망하는 퇴직을 하지 않으면, 희망 퇴직금도 없이 어느 순간 갑자기 퇴직을 당하는 건 아닐까 두려웠다. 남편은 희망 퇴직금으로 대출도 갚고 무엇이든 할 수 있지 않겠냐고, 이런 기분으로 더 다닐 순 없을 것 같다고 고백했다. 이런 상황에 남편을 위로하고 뜻을 존중해 줘야 좋은 아내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과 어떻게든 회사에 더 다닐 수 있다면 뭐든 하고 싶다는 절박함이 교차했다.



 벨라루스의 저널리스트이자 작가인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는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라는 저서로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그는 수많은 전쟁 이야기가 있지만 자신이 또 한 번 전쟁 책을 쓰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그리고 전쟁에 대한 이야기는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쓰지 않았던가. 하지만...... 그건 모두 남자들이 남자들의 목소리를 들려준 것이다. 그건 분명한 사실이다. 우리는 전쟁에 대한 모든 것을 '남자의 목소리'를 통해 알았다. 우리는 모두 '남자'가 이해하는 전쟁, '남자'가 느끼는 전쟁에 사로잡혀 있다. '남자'들의 언어로 쓰인 전쟁. 여자들은 침묵한다. 나를 제외한 그 누구도 할머니의 이야기를 묻지 않았다. 나의 엄마 이야기도, 심지어 전쟁터에 나갔던 여자들조차 알려들지 않았다. 우연히 전쟁 이야기가 시작되더라도, 그건 '남자'들의 전쟁 이야기지, '여자'들의 전쟁은 아니다...(중략)...

  여자들의 이야기는 전혀 다른 것이고, 또 여자들은 다른 것을 이야기한다. '여자'의 전쟁에는 여자만의 색깔과 냄새, 여자만의 해석과 여자만이 느끼는 공간이 있다. 그리고 여자만의 언어가 있다. 그곳엔 영웅도, 허무맹랑한 무용담도 없으며, 다만 사람들, 때론 비인간적인 짓을 저지르고 때론 지극히 인간적인 사람들만이 있다."


  희망퇴직은 우리의 일상을 파편화했다. 요리를 하기 위해 접시를 꺼내다가도 손끝이 떨려왔고, 아이들을 씻기기 위해 옷을 벗기다가도 눈물이 쏟아졌다. 글자가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고 이마에 무거운 추를 단 듯 중심이 앞으로 기울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머릿속에 망치질하듯 두꺼운 진동이 느껴졌다. 실체 없는 두려움은 연기처럼 덮쳐와 숨통을 옥죄고 시야를 가리고 귀를 막았다. 누구에게 이야기하고 조언을 구해야 할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따뜻한 위로와 조언을 듣고 싶은 마음을 이런 상황을 들키고 싶지 않은 수치심이 억눌렀다. 우리의 잘못이 아닌 '희망퇴직 대상자'가 우리를 부족하고 무가치한 존재로 느껴지게 만들었다. 여기저기 검색을 해보았지만 누구도 심장을 옥죄는 고통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간혹 있는 글들도 이 마음을 나누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그 가족의 생각, 보고 느끼고 살아있는 감정선과 돌파구에 대해 말하는 이는 없었다. 넘쳐나는 희망퇴직금에 대한 기사들 속에서 진짜 희망퇴직 대상자의 이야기, 그 가족의 이야기를 적으려 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