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돋을볕 Mar 09. 2023

"애들도 어린데 이제 너희 큰일 났다"

나를 뒤 흔드는 말

전엔 쉽게 했던 말도 이젠 혼자 뒤척인다. 된장은 발효되면 맛이라도 좋은데 풀지 못한 말은 몸덩이를 부풀려 괴상한 쪽으로 흐르고 만다. 희망퇴직 사건이 붉어지고 남편은 여러 지인들에게 연락해 길을 찾았다. 나는 혹시라도 내 말이 남편에게 수치가 될까 싶어 침묵했다. 남편을 통해 듣는 타인의 말들은 날카로운 검이었다. 무엇이든 베어내며 앞으로 돌진할 것 같았다.  "때로는 너만 생각해도 괜찮아. 이기적이어도 돼." 남편은 그 말들에 힘입어 언제든 퇴직할 용기를 얻었다. 남편의 실직을 걱정하고 앞으로가 막막한 내게 누군가는 이렇게 말했다. "남편이 하자는 대로 해. 실패하더라도 그게 낫다"


  작년에 시골에서 키우는 흑염소가 야산에서 내려온 삵에게 목덜미를 물렸다. 산에 염소와 닭들을 방목해 키우는데 때때로 배고픔에 시달린 너구리, 삵 같은 야생동물들이 내려와 가축을 해한다. 닭 몇 마리는 등부분 털이 볼품없이 뜯겼고 몇 마리는 사라졌다. 그중 흑염소는 어린 어미였다. 태어난 지 얼마안 된 새끼염소 세 마리에게 젖을 물려 키우는 중이었다. 삵은 뛰어난 사냥꾼이고 영리하기까지 하다. 분명 어미 염소가 아니라 힘없는 새끼염소들을 노렸을 것이다. 어린 어미는 제 새끼들을 구석으로 몰아붙여 자기 몸을 내던졌다. 삵은 우두둑 소리가 날 정도로 어미의 목을 물고 늘어졌다. 무기라곤 머리 위에 귀엽게 솟은 작은 뿔밖에 없는 염소는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그저 끝까지 새끼들을 지켜야겠다는 본능에 충실했을 것이다. 날이 밝고 발견된 염소는 죽은 것 같았다. 미동도 없이 누워 새벽이슬을 맞고 있었다. 그 곁에 새끼 염소들이 달라붙어 장난치듯 뒹굴다가 쓰러진 어미의 젖을 빨았다. 아버지는 염소를 살리기 위해 응급 치료를 하고 주사를 놓고 약을 먹였다. 일주일쯤 버텼을까. 어미 염소는 결국 젖먹이들을 남겨놓고 세상을 떠났다.


  우리에게 희망퇴직 사건은 한가롭게 풀을 뜯던 염소무리에게 닥친 삵과 같았다. 가족을 파괴하고 일상을 괴롭혔다. 우린 여러 응급조치를 했지만 삵을 당해낼 재간은 없었다. 이번엔 어찌어찌 잘 넘긴 듯싶지만, 누군가 삵을 잡거나 튼튼한 울타리를 보수하지 않는 이상 삵이 또 들이닥친다면 큰 희생을 치르고 말 것이다. 나는 매일 언제 다시 삵이 다시 나타날까 싶어 구멍 난 울타리를 맴돈다.


  나는 남편과 다른 사람이라서, 남편을 통해 듣는 타인의 말들은 더부룩한 항생제 맛이 난다. 병을 치료하고 고치는 데 필요하지만 복용 시에는 부작용을 동반하고 소화가 어려운 신비의 약. 삵이 우리 집 울타리를 넘어온 이후 남편과 자주 싸운다. 남편과 나는 희망퇴직에 대한 관념부터 가정을 지키는 방법, 이후의 진로까지 전혀 다른 주파수를 울린다. 화해하고 해결됐나 싶으면 엉뚱한 곳에서 지뢰가 터진다. 그럴수록 나는 상처받고 움츠러든다. 남편과 이야기하면 내가 얼마나 한심한 존재인지 깨닫는다. 나는 경제적 능력을 상실했고 아는 지식도 없다. 세상을 보는 현실 감각도 부족하고 주관적인 견해에 사로 잡혀있다. 지금까지 우리 가족을 부양하고 먹여 살린 남편의 말을 따라야 하는 건데 그게 너무나 힘들다. 최선을 다해 나를 부인하고 노력하지만, 내 힘으로 안 되는 한계가 있다. 억울하고 자괴감이 들고 머리가 울리고 온몸에 힘이 빠진다. 사람들의 말을 듣다 보면, 나는 세상에 필요 없는 악한 방해꾼이 된 것 같다. 세상 모두가 나를 욕하는 기분이다. 지금까지 살아온 내 삶을 부정당하고 헛산 기분이다.


  물론 남편이 나에게 그렇게 말하진 않는다. 그러나 남편을 통해 듣는 타인의 말, 나에게 쉽게 던지는 누군가의 말이 불화살이 되어 날아든다. 남편이 시부모님께 희망퇴직 대상자가 되었다는 소식을 알렸다. 나는 혹시 남편에게 안 좋을까 싶어 친정에 알리지 않았다. 그로 인해 아군이 없는 전쟁터에 서 있는 심정이었다. 시어머니는 크게 걱정하셨다. 쉬지 않고 내 전화벨이 울렸다.

"아이고 어떡하니. 이제 큰일 났다. 너는 웃음이 나오니? 나는 잠도 안 오고 밥도 못 먹어서 살이 2kg나 빠졌다. 네가 남편 오면 무조건 잘한다고 해줘라. 회사에 뭐라도 사들고 가봐라. 애들도 어린데 이제 너희 큰일 났다. 우리 아들 불쌍해서 어떡하니."


  간신히 평안을 찾은 내게 전화는 쥐약 같았다. 평화롭게 노닐던 비둘기도 한순간에 목숨을 잃게 만드는 쥐약. 전화를 받고 나면 앉을 수도, 서 있을 수도, 걸음을 옮길 수도 없었다. 인내 끝에 마음을 모아 진심을 건넸다.

"어머니가 얼마나 걱정하시는지 잘 알겠어요. 걱정해 주셔서 감사해요. 그런데 저는 어머니가 저희보다 어른이시니까 괜찮다고 해주셨으면 좋겠어요. 잘하고 있다고, 기도해 주겠다고, 같이 길을 찾아보자고 그렇게 위로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어머니가 힘들다고, 우리 이제 망했다고 하실 때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세상이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아요."


  다행히 시어머니는 이후 크게 달라지셨다. 내 앞에서 전과 같이 말씀하지 않으셨고 말을 아끼셨다. 희망퇴직을 거부한 이후, 시부모님을 위로해 드리고 남편의 쉼을 위해 시댁에 다녀왔다. 아이들 덕분에 조금씩 대화에 웃음소리가 섞였다. 숨이 조금씩 쉬어지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다시 한 마디 말이 나를 뒤흔들었다.

"내가 가서 애들 봐줄게. 네가 나가서 뭐라도 해봐라."


  나는 현재를 지속하고 싶어 하고 남편은 변화를 갈망한다. 나는 지금 우리 가정의 모습이, 내 모습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하다. 아이들 곁에서 맛있는 밥을 해주고, 종알거리는 말을 듣고, 말캉하고 따뜻한 손을 잡고, 지난달에는 접어 입었던 옷의 단을 펴주는 기쁨을 누린다. 공부하거나 노력해야만 무엇인가를 얻고 성취할 수 있다고 믿었던 세상에서 아이들은 내게 존재 자체의 사랑을 알려준다. 육아를 하면서 글을 쓸 수 있어서 자력 발전기가 돌아간다. 그러나 지금 일을 다시 시작하는 건 이 모든 것을 잃어야 한다는 말과 같다. 물론 그동안 기쁨을 누렸으니 남편과 같이, 혹은 내가 일을 하는 것도 대안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일을 할 수 있는 자리를 알아볼수록, 아이들을 생각할수록 바람 부는 옥상 위에 홀로 서 있는 기분이 든다. 사람들의 수많은 말들이 내 발목을 잡아끌어서 발 디딜 곳이 안 보인다. 눈 떠보니 경력 단절 10년 차에, 아이들은 한창 보호자의 손길이 필요하다. 할 수 있는 일은 최저시급에 하루 종일 집을 비워야 하는 게 대다수이다. 그렇게 번 돈으로는 아이들 도우미 비용이나 엄마의 자리를 대신해 늘려야 할 학원비에는 턱없이 모자라다. 무엇보다 내 마음이 아이들의 빈자리를 견딜 수 있을까?

아이가 만들어 준 <마우스(왼쪽)>. 글 쓸 때 쓰라며 3D 펜으로 만들어 선물해 줬다


  남편과 나는 각자의 우물에 빠져서 마음에 여유가 없다. 우물 안에서 손을 뻗고 다리에 힘을 줘 기어 올라갈 힘이 없다. 밖으로 나가 타인의 우물에 사다리를 던지고 길어 올릴 에너지가 없다. 쥐어짜 내 간신히 아이들을 돌볼 뿐이다. 로버트 멍어 목사가 쓴「내 마음 그리스도의 집」에서는 마음을 집에 비유한다. 서재, 주방, 침실 그리고 벽장에 이르기까지 구석구석을 예수님께 내어놓는 주인공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침대를 뒤엎고 소파를 옮기고 더러운 곰팡이와 캐캐 묵은 먼지를 들쑤시며 극렬한 저항에 시달리지만 결국 가장 아름다운 집을 만나게 된다. 희망퇴직으로 들쑤셔진 우리 가정의 문제도 눈감고 돌아서면 아무 일 없던 것처럼 그냥 지나칠 수도 있는 일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희망퇴직 권고를 받는 시대이니, 많은 사람들이 덮어두고 마는 문제일 수도 있다. 괴로운 일이지만 이런 고비로 인해 우리는 더 단단해지고 깨끗해질 수 있다고 믿는다.


  미국 고등교육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이자, 시민들의 멘토로 추앙받는 사회운동가 파커 J. 파머는 우울증을 통해 영혼의 고통에 다가갔다. 그는 모든 길은 아래로 향한다고 설명한다. "약점과 치부, 어둠을 나의 일부로 받아들이면 그런 것 때문에 내가 흔들리는 일이 줄어든다. 왜냐하면 그것들이 원하는 것은 내 자아의 일부로 알아 달라는 것뿐이니까 말이다". 「삶이 내게 말을 걸어올 때」에서 그가 한 고백이다. 사람들이 내게 던진 말들은 나를 상하게 했다. 그 말들의 공통점은 악의가 없다는 점이다. 도와주고 싶어서,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말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자칭 도움의 말'은 차단하고자 한다. 그렇지 않아도 피곤한 인생에 타인의 핍절한 경험까지 더하고 싶진 않다. 얕은 냇물은 작은 돌멩이에도 요동치지만, 깊은 바다는 대형 크루즈가 와도 꿈적하지 않는다. 약점과 치부, 우울함을 가진 게 진정한 나다. 어둠은 내 자아의 일부분이다. 미스터리한 일이지만, 아픔을 베어 물고 삼킬수록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나는 부산스러운 움직임을 멈추기로 했다. 타인의 말에 휘둘려 갈 곳을 잃은 겨울 제비가 되고 싶진 않다. 다만 이토록 상처받고 휘둘리는 내 마음 깊은 곳을 돌아보고 돌보려 한다. 상처 난 곳에 연고를 바르고, 썩은 곳은 도려낼 것이다. 아름다운 마음의 집을 얻기까지 청소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봄을 앞두고 가지치기가 한창이다. 쳐낸 가지의 양이 수북해 놀랐다. 저만큼을 쳐내야 묵은 때를 벗기고 봄을 맞이할 준비가 된다.



이전 05화 태풍이 지나간 자리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