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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돋을볕 May 16. 2023

남편을 수영장에 등록시켰다

남편이 자존심을 뒷주머니에 구겨 넣고 회사에 간다

  남편이 올 초 희망퇴직 대상자에 올랐었다. 이제 겨우 마흔을 넘긴 남편에게 희망퇴직 대상자에 올랐다는 말은 큰 충격이었다. 한 직장에서 15년 넘게 일했고, 외벌이이며, 어린 자녀들이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오랜 시간 같은 패턴의 삶을 살았던 우리에게 남편이 현 직장을 그만둘 수도 있다는 말은 청천벽력처럼 느껴졌다. 우리는 희망퇴직을 하지 않기로 결정했지만, 그 안에서 많은 과정을 거쳤으며 여전히 진행 중이다. 이 사건으로 인해 우리의 사고방식이 완전히 뒤집혔기 때문에 현재 진행 중이라고 여긴다. 사회와 동 떨어져 자급자족의 삶을 사는 사람이 아닌 이상 누구나 '현 직장'을 그만둘 수밖에 없으며, 자의든 타의든 전혀 새로운 삶을 사는 게 인생이란 걸 배운다.


  남편이 자존심을 뒷주머니에 구겨 넣고 자신의 하루 중 절반을 뚝 떼어 회사로 가져간다. 자신을 무시하는 사람, 성과는 안 나고 흠집만 생기는 일, 뱃속이 요동쳐도 꾹 참고 셔틀버스 시간을 지켜야 하는 아침, 입맛이 없어도 꾸역꾸역 밥알을 밀어 넣는 점심, 보기 싫은 사람에게 머리를 조아리는 회의시간, 본업은 밀리고 뒤탈만 번지는 출장, 휴일 뒤 겹겹이 쌓인 일감을 두루마리 휴지처럼 둘둘 말아 머리에 이고 지고 회사를 다닌다. 하루 중 절반을 준다는 건 사실 하루를 몽땅 준다는 것과 같다. 남편이 학생 신분을 벗어나 자신의 숟가락은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는 걸 배우는 순간부터, 숟가락이 점점 늘어나 책임감이 능력을 훨씬 능가했단 걸 깨닫는 날까지도 계속 밥벌이를 했다. 그리고 다른 모든 곳을 제쳐두고 들어갔던 회사에서 젊은 날을 보내고 자신의 전문분야가 생기기 시작했는데 돈을 줄 테니 나가달라는 말은 얼마나 무자비하고 파괴적인가. 남편뿐만 아니라 어딘가에서 억울하게 머리를 조아리고 목구멍에 밥알을 밀어 넣기 위해 자신의 영혼을 팔아 인생을 살아가는 안타까운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이 땅이 천국이 아닌 이상 사람은 슬픔을 먹고 자란다는 걸 배운다. 정당한 근로의 대가로 밥을 먹고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슬프도록 아름다운 존재인지 경외감이 솟는다.


  아직 아이들이 어리다 보니 남편은 퇴근 후에도 쉬이 쉴 수 없다. 내가 저녁을 차리면 남편은 아이들을 씻기고, 내가 첫째의 공부를 봐주면 남편은 둘째를 돌본다. 아이들을 먹이고 씻기고 가르치고 정리하고 나면 시계는 분주하게 하루를 쫓아낸다. 만날 수 있는 친구도, 시간도 없고 가치관이 맞는 사람은 더더욱 찾기 어려워서 40대의 남편은 자기 안에 고립되기 쉽다. 나도 별반 다르지 않아서 남편과 나는 가장 친한 친구이자 서로의 보호자로 지낸다. 그래도 나는 아이들을 학교와 어린이집에 보낸 후 오전 시간을 잘라서 글도 쓰고 가끔 즐거운 만남도 가진다. 보채는 아이들 없이 우아하게 식당에 앉아 식지 않은 밥을 먹을 때도 있다. 선선한 바람이 부는 아침에 장미 넝쿨 길을 지나고, 뜨거운 햇빛이 내리쬐는 오후에 사람들이 아이스커피를 마시는 모습도 본다. 병원이 문을 연 낮 시간에 진료를 받을 수 있고, 하루에 만 보씩 걸으며 동네 구경도 한다. 그러나 하루를 살라, 몇십 년을 살라 창문도 없는 연구소에 있는 남편은 욕 안 먹으면 다행인 하루를 보낸다. 나는 남편에게 늘 고맙고 미안한 마음을 갖는다.

  남편에게 다른 세상을 선물해 주고 싶었다. 나와 아이들이 없는, 회사도 아닌 다른 세상. 지쳐서 아무것도 못하겠다는 남편에게 힘들면 한 달만 해보고 그만둬도 좋다고 말하며 여러 모임에 등록시켰다. 주중에는 줌 모임, 주일에는 실제로 만나는 모임에 들여보냈다. 다양한 사람들과 이야기도 나누고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사는 지도 들으며 위로와 쉼이 있기를 소망한다. 벌써 몇 달이 지났지만 남편은 그만두지 않고 모임을 이어가고 있다. 전보다 많이 웃고 마음이 가벼워진 걸 느낀다.


  내가 남편을 위해 해줄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지만, 남편에겐 그게 전부일 때가 있다. 사람이 꼭 해야 하는 일중 하나가 운동이라 생각하는데, 남편은 시간이 없단 핑계로 운동을 하지 못한다. 남편에게 있는 자유 시간은 저녁과 주말이 전부인데 그때에 아이들과 있으니 걷기 조차 마음대로 할 수가 없다. 아이들이 아빠를 무척 좋아해서 함께 있으면 웃음꽃이 피지만 그럴수록 더 건강 관리가 필요하다. 남편 회사에도 심각한 질환에 걸린 사람이 많다고 한다. 지난주 직장에서 해주는 건강 검진을 받고 왔는데 이상 소견이 나왔다. 일주일 뒤에 전문의의 진료를 받으며 아무 이상 없다는 결과를 듣기까지 머리에서 심장까지 피가 빠르게 요동쳤다. 아무 이상이 없다는 진찰을 받자마자 집 근처 수영장에 남편을 등록시켰다.

  남편은 수영을 좋아하고, 강습보다는 자유 수영을 하고 싶다고 전에 말한 게 생각나서 자유 수영을 월회원으로 끊었다. 전부터 무엇이든 하라고 등 떠밀었지만 남편은 아이들을 혼자 돌 볼 내 걱정 때문에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하지 않으면 아마 계속 아무것도 하지 못할 것이다. 내 코가 석자라고 나도 남편 없이 혼자 아이들을 씻기고 가르치고 재우려면 속으로 참을 인을 백 번도 더 새긴 뒤에 고꾸라지듯 잠에 들어야 하지만, 남편이 가족을 위해 회사에 가는 것처럼 나도 남편을 위해 무언가를 해주고 싶다. 저녁 식사 후 남편을 등 떠밀어 수영장으로 보내는 데, 투명 물고기인 남편의 얼굴에 마음이 다 드러난다. 뒷 상황이 걱정된다면서도 입꼬리는 가벼워져 광대뼈까지 튀어나왔다. 발걸음이 사뿐하고 긴장된 근육이 없어 등도 활짝 펴졌다.

  "내가 수영복이 있던가?"

  물건을 어디 뒀는지 절대 못 찾던 손길은 바쁘게 움직이며 나를 호출한다.

  "옷장 가운데 서랍에 수영복만 넣어둔 곳 있어."

  수영복 사줄까? 물어보면 필요 없다고 할 게 뻔해서 내 마음대로 사뒀더니 저리 잘 입고 다닌다. 남편 없는 저녁은 몸이 열개여도 모자라지만, 수영 다녀온 뒤 업어가도 모를 정도로 눕자마자 잠든 남편을 보니 마음은 흐뭇하다. 운동할 시간이 없다는 사람은 반드시 아픈 시간이 있을 것이라는 잉글랜드 의사의 격언을 떠올린다.

즐거운 수영의 흔적



  정신과 의사이자 사상가인 M. 스캇 펙은 <아직도 가야 할 길>의 첫 문장을 "삶은 고해다"라는 말로 시작한다. 삶이 힘든 것은 문제를 직면하고 해결하는 과정이 고통스러워서지만, 진정으로 삶이 힘들다는 것을 알고 받아들이게 되면 더 이상 힘들지 않게 된다고 풀이한다. 희망퇴직은 고통스러운 문제지만 커다란 관점에서 보면 고작 이런 작은 문제로 인생이 끝나진 않을 것이다. 살다 보면 더 끔찍하다고 여길 수많은 문제가 도사리며 우리를 능구렁이처럼 휘감아 옥죌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앞으로 살아갈 날이 우울하고 무기력하게 다가오기도 한다. 더 나아질 희망보단 고난이 많다고 여겨지지만, 나에겐 헤쳐나갈 능력 따윈 없다. 삶이 고해란 사실에서 벗어날 방법은 삶이 힘들다는 걸 그저 받아들이는 사실이라는 게, 나에겐 여전히 어려운 숙제처럼 다가온다.


  짙은 허무가 뭉게구름처럼 피어오를 때 <오웰의 장미>를 생각한다. 미국의 역사가이자 저술가인 리베카 솔닛은 거친 투쟁과 풍자로 저명한 작가 조지 오웰이 '장미가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정원'을 가꿨다고 이야기한다. 아무리 글과 삶이 다를 수 있다고 해도 오웰의 작품 <동물농장>이나 <1984>를 떠올리면 그가 6펜스짜리 장미 묘목을 심는 장면은 상상이 어렵다. 그러나 이러한 진실을 통해 사회의 부정성 못지않게 삶의 아름다움과 기쁨을  즐기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고 의미 있는 행동인지 깨닫는다. 사는 게 힘들어도 마음을 기울여 애정하고 가꾸고 향유하면 동시에 살아갈 힘을 얻을 수 있다.


  "우리 대부분은 각자의 삶을 고통을 피하기 위한 여정에 비유하거나, 혹은 그렇게 이야기하도록 배웠다. 최종 목표가 의미나 명예 혹은 경험을 얻는 것이라면, 똑같은 사건이 작은 승리가 될 수도, 목표에 이르기 위해 필요한 과정이 될 수도 있다. 개인은 중요하다. 개인이란 집과 같다. 하지만 우리는 집 안에 가만히 있기보다는 그 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니기도 하고 때로는 밖으로 나오기도 한다" 리베카 솔닛의 또 다른 저서 <멀고도 가까운 -읽기, 쓰기, 고독, 연대에 관하여>에서 연대의 중요성에 관해 이렇게 설명한다. 자꾸 엉키고 엉망이 되어가는 삶도 함께 가꾸면 장미 정원에 꽃을 피울 수 있다. 남편이 회사를 나오게 되면 우리 가족은 어떠한 삶을 살게 될까? 언제인지 알 수 없는 그때가 여전히 갑갑하지만, 그때에 우리가 함께 담담하길 소망한다. 지금의 일상을 소중히 누리고, 미래의 어려움을 지금 함께 나눠 가지고, 우리의 장미 정원에 분수를 피워 올린다.


작성일 2023.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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